•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1909년 9월 1일부터 시작되는 남한대토벌작전의 목적을 일본군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특히 전라남북도는 광활한 수십리의 기름진 평야를 가까이 두고 있고, 지세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좋은 항구가 적지 않아 선박교통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몽매하여 발전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다름 아니라 폭도가 창궐하여 지방산업의 발달을 저해하고, 政令의 보급을 방해하고 각지를 황폐화시킨 때문이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4∼85쪽).

즉 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남북도는 ‘몽매’한 의병들의 투쟁에 의하여 일본세력을 부식할 수 없고, 또한 해상 의병들의 활동에 의하여 쌀을 일본에 반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가장 많은 수출품이 쌀이었고, 한국에 대한 민간자본의 가장 매력있는 투자대상도 곡창지대의 토지였다. 따라서 전라남북도는 일제의 경제침략의 주된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침략의 길을 트자는 것이 이 작전의 첫째의 목적이었다.

또한 전라남북도의 한국인은 청일·러일전쟁에서 한번도 우리 군대의 활동을 목격한 바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진가를 모르고, 임진년(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다. 이 기회에 단호하게 대토벌을 결행하고 파견대의 전력을 기울여 전라남도의 산야를 유린해서 賊徒를 하나도 남김없이 근절하고, 南陬·北陸·산간·도서의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皇軍의 엄숙함과 용감한 武威에 경탄하고 전율케 하여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회복을 해야만 한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4∼85쪽).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육상에서의 의병투쟁에 의하여 일본 육군도 이 지역에는 침입을 못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본군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역사상의 명예회복을 하자는 것이 둘째의 목적이었다.

그들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그 범위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그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남부와 경상남도 동부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임시파견대 2개 연대와 헌병·경찰을 투입하고, 해상에는 水雷艇 4척을 배치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작전기간을 9월 1일부터 40일로 책정하여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제1기 (9월 1일∼15일)

일본군경을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서 우선 경비부대로 포위망을 형성한다. 전라남도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남부의 장화도·부안·태인·갈담·남원으로부터 경상남도 동부의 화개·하동·고포를 연결하는 외곽선과, 전라남도를 둘로 나누어서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관통하는 법성포·영광·삼거리·서창·능주·보성·서동·소록도·각석도·황제도를 연결하는 선에 경비부대를 포치하여 포위망을 형성한다. 행동부대는 이 포위망 안에서 ‘攪拌的 방법’으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토벌·수색·검거를 반복한다.

제2기(9월 16일∼30일)

잔존 의병들을 전라남도 서남단의 반도부에 몰아 넣어서 포위망을 압축하여 역시 ‘교반적 방법’으로 뿌리 채 소탕한다.

제3기(10월 1일∼10일)

전라남도 서남각의 여러 섬들을 소탕한다(金正明 編,<全羅南北道 討伐實施計劃에 관한 件>, 79∼81쪽).

일본군이 말하는 새로운 전술로서의 ‘교반적 방법’이란 다음과 같다.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지역내에서 교반적인 수색을 하고 전후좌우로 왕복을 반복하여 奇兵적인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여유가 없도록 함과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경비선 및 소수부대로 연안 도서 등으로 도망가는 폭도에 대비하도록 하는 등 포위망을 조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朝鮮駐車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50쪽).

즉 일본군의 ‘교반적 방법’이란 전라남도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된 게릴라전술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이라 하겠다.

처음에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10월 10일까지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10월 30일까지 연장하여 마을간의 왕복을 차단하고 한 마을을 2회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10여 회에 걸쳐 수색을 반복했다. 9월 1일부터 2개월간에 걸친 토벌작전으로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그 외곽 일대는 살육·방화·약탈·폭행 등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전라남도 출신 유생 黃玹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왜인들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함에 있어서, 위로는 珍山·錦山·金堤·萬頃으로부터, 동으로는 晉州·河東으로부터, 남으로는 木浦로부터, 사방 둘레를 그물치듯이 해놓고 순사를 파견하여 마을을 수색하였다. 집집마다 빗질하듯이 뒤지면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살육하기 때문에 행인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이웃 마을끼리도 통행이 불가능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강한 자는 앞으로 돌진해서 싸우다가 죽고, 약한 자는 기어 달아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서 강진·해남에 이르니 달아날 곳이 없어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黃玹,≪梅泉野錄≫권 6, 융희 3년).

2개월에 걸치는 작전기간 중에 앞에서 언급한 200명 이상의 의병부대를 거느리는 의병장 중에서 전해산을 제외한 심남일·안규홍·임창모·강무경을 비롯한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들이 자수·체포·피살되었다. 전해산도 은신중 12월에 체포되었다.

‘남한대토벌’의 결과 한국합방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은 1909년 말까지 사실상 마무리되고 일제의 경제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측도 그 성과를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금번의 토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농업경영자 및 상인 등이 연이어 내륙에 진입하여 아주 일찍 사업에 착수하는 자도 볼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착실한 일본인의 식산흥업이 결실을 거두고 일본인의 대한사업의 발흥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개발유도하는 데도 커다란 효과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92쪽).

일본군을 뒤따라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이 곡창지대를 노려서 쇄도하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토벌작전의 경제적 효과에 대하여 일본군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度支部의 의뢰에 의해 행동부대로 하여금 보조화폐를 산포케 한 것은 장차 이 화폐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화폐제도를 정리하는 데 도움되는 바가 크다고 하여 당국자의 감사를 받은 바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있던 메가다(目賀田種太郞)는 일본자본을 무제한으로 한국에 침투시키기 위한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구화폐를 회수하고 신화폐를 보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구화폐로서의 白銅貨와 葉錢의 유통지역이 각각 다르게 되어 있었다.

엽전 유통지역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및 함경남북도이다. 특히 일본 민간자본이 노리고 있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에서는 완강히 신화폐를 거부하고 의연히 엽전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에 대한 경제침략의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작전’과 병행하여 엽전을 회수하고 일본화폐와 무제한 교환할 수 있는 신화폐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여간 ‘남한대토벌작전’이 종료된 후에 소부대에 의한 의병들의 게릴라전은 지속되었으나 일제가 한국을 합방하는 데 지장이 될만한 저항투쟁은 기본적으로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에 접어 들면서 이미 유명무실화된 한국의 주권을 송두리째 박탈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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