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국 군중의 과감한 항거투쟁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및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1910년 8월 29일에 한국은 완전한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의병활동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남한대토벌작전’ 후에 의병투쟁의 2대 중심지는 황해도와 경상북도 북부의 일월산 주변이었다.

황해도에서는 李鎭龍 부대에 속하는 韓貞萬·孔泰元·金貞安·崔順巨 등의 部將들이 서로 연합과 분산에 의해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이진용·한정만·공태원은 경기도 長湍, 황해도 延安·白川·載寧·遂安을 횡행하며 각각 40∼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延基羽와 더불어 기맥을 통하였다.

이진용은 積城 紺岳山을 근거지로 삼고, 연기우와 이진용은 여러번 일본 연합부대와 싸워서 이겨 살상이 심히 많아 일인들이 이들을 가장 두려워 했다.

일본 수색대가 이진용 군대를 찾으면 흩어져서 민중의 촌락에 유숙하고 이진용은 그 부하와 더불어 농민 의복으로 갈아입고 그 종적을 감춘다. 이진용은 또 때로는 농민과 서로 섞이어 기차를 타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일본인의 동정을 살폈으니 그의 智勇은 이와 같았다(鄭喬,≪大韓季年史≫권 9, 융희 4년).

황해도에서의 게릴라전에 호응하여 경기도에서도 연기우·姜基東 부대들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활동지역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의병장 연기우·강기동·田聖瑞·李漢京은 경기도의 楊州·抱川·朔寧·麻田, 그리고 황해도의 兎山·金川·재령 등지를 왕래하면서 각각 20∼30명을 거느렸다(鄭喬,≪大韓季年史≫권 9, 융희 4년).

이와 같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소부대는 농민과 일체가 되어 서로 변신하면서 일본 군경의 조밀한 포위망과 집요한 수색을 뚫고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군경은 이를 방치할 리가 없었다.

1910년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까지는 ‘남한대토벌작전’에 참가한 임시파견대 중의 1개 대대에 헌병·경찰을 연합시켜, 일월산 주변의 안동·예천·영춘·봉화 일대를 포위하여 ‘교반적 방법’으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황해도에 대해서도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걸친 40일 동안, 1개 여단의 병력을 여기에 집중시켜 역시 ‘교반적 방법’으로 수색·체포·살육을 감행하였다.

합방과 동시에 실시된 헌병경찰제도의 최고 정상에 위치한 헌병대 사령관겸 경무총감 아카시(明石元二郞)는 헌병과 경찰간부들을 소집한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훈시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오늘날은 이미 폭도봉기(의병전쟁)의 시기를 경과하였다. 물론 다시 봉기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장래의 위험은 인민의 문명이 진전됨에 따라 일어날 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과 유사한 위험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평분자들이 폭동으로 나타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오히려 제압하기 쉽다. 제압하기 어려운 것은 위험한 비밀결사의 발생이다(小森德治,≪明石元二郞≫上, 452∼453쪽).

과연 그는 탄압정책의 베테랑이었다. 바로 1914년 4∼5월에 의병전쟁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의한 비밀결사 獨立義軍府에 대한 대검거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일제의 총독정치에 대신하는 항일조직 독립의군부를 설치하여 중앙에는 과거에 최익현을 추대하여 전라북도 순창에서 이거했던 林炳瓚을 中央巡撫總將으로 삼고,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 각 군에는 군수, 각 면에는 향장을 배치하였다. 심각한 국권회복의 思念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되는1267)慶北警察局 編,≪高等警察要史≫(1934), 177쪽. 독립의군부는 사상적으로 최익현·허위·이인영 계열에 속하는 위정척사파가 중심이 되어 있다.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은 바로 1914년의 독립의군부사건을 고비로 조직적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896년 이래 위정척사파에 속하는 한국의 유학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건지기 위하여 바로 殺身成仁의 기지를 높이 들고 그 나름대로 피어린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들의 비장한 투쟁과 희생은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한국 유학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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