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전쟁은 원래 국가간의 무력충돌을 말하고, 전쟁 의사를 결정할 당국의 대내적인 결정 절차에 의한 충돌이어야 국제법상 전쟁이라 말한다. 그러한 결정 절차를 밟지 않은 일부 무장부대간의 충돌은 사변이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273)일본에서 만주사변이나 상해사변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한 뜻에서 사용한 것이다. 실제는 침략전쟁이었으나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부대 단위의 무력충돌인양 꾸몄다. 즉 만주 주둔군의 무모한 무력행사가 빚은 사변이라 했던 것이다.
라이샤워(민두기역),<일본제국의 승리와 비극>(≪동양문화사≫하, 을유문화사, 1969), 679쪽.
그렇다면 한말 의병도 일부 무장부대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대한제국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전쟁 의사를 결정할 국왕과 정부가 전쟁 의사를 결정하지 않았다면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제국 국왕과 정부는 국민이나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특히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는 대한제국의 주권의 행사인 통치행위가 일본제국주의의 ‘시정개선의 충고’1274)한일의정서 제1조: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여 시정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容)할 사.라는 명목의 간섭으로 제약을 받았다. 그 후에도 그 해 8월의 한일협약으로, 이듬해 11월의 을사조약의 소동 후 통감부의 설치로, 1907년 7월의 한일신협약으로, 통치권의 제약은 심화되었다. 주권의 본질인 최고·유일·절대·불가분의 성격은 1904년 2월부터 가시적으로 잠식되고 박탈당하여 결국 1910년에 이르러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왕과 정부는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쟁 의사도 결정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럴 때 민족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권의 형식적 당국자가 아니라 민족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민족 자체라면 모호하기 그지 없다.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해서 민족의 대표 의지를 포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운동의 주류의지와 행동양식을 민족의 대변자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구한말 민족운동의 주류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당시의 사람도 의견이 갈리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학설도 일치한 것 같지가 않다.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운동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고 의병의 의지가 민족의 양심과 의지를 대변했다고 믿는다.1275)필자의 구한말 의병에 대한 의견은 다음의 연구물에 나타나 있다.
조동걸,≪의병들의 항쟁≫(민족문화협회, 1979).
―――,<한말 의병운동의 민족주의상의 위치>상(≪한국민족운동연구≫1, 1983);≪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한말 의병운동의 민족주의상의 위치>하(≪한국민족운동연구≫3, 1985, 위의 책).
―――,≪한말 의병전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그러므로 의병운동을 민족의지를 표현한 성격의 호칭인 의병전쟁이라고 한 것이다.

민족운동의 세계사적 유형은 민족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 및 민족통일운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의 정상 궤도라면 반봉건적 민족혁명운동이 선행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에도 그것이 개화, 개혁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으로 나타났는데 그러한 민족혁명운동의 추진 중도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민족혁명운동과 더불어 반제국주의운동인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다. 그 때 어느 것을 우선하고 상위개념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는 역사조건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1904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때부터는 민족해방운동이 앞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한말 민족운동에서 계몽운동보다 의병전쟁이 민족의 중심 이념이었고 민족운동의 주류 의지였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계몽운동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1276)조동걸,<한말 계몽주의의 구조와 독립운동상의 위치>(≪한국학논총≫11, 국민대, 1989), 47쪽. 그러나 의병전쟁과 비교했을 때, 근대지향적이기는 해도 구국이념의 성격이 모호했거나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의병전쟁을 민족운동의 주류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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