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3) 이념상의 특징

3) 이념상의 특징

전기의병은 위정척사를 위한 척사의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위정척사란 용어는 정조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자료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알려진 바인데, 그 때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척사의 주체이념인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이었으므로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초기에 원류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때는 위정의 의식은 있어도 척사의 논리는 당장에 필요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부정하려는 구체적인 객관적 작용이 대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성리학의 확산만이 과제였다. 그리하여 향교와 서원, 향약과 가묘의 설치를 추진하면서 성리학 지배체제를 수립해 갔다. 그러한 가운데 사림파가 집권하는 조선 중기를 맞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성리학에 철저한 사림파가 집권했던 이유외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리학의 본산인 명나라의 원조를 받게 되어 성리학의 확산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국경을 초월한 성리학의 보편주의 의식과 질서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서양 중세의 가톨릭 보편주의와 같은 성격의 역사 현상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후 명나라가 멸망하자 성리학 국가로는 조선만 남게 되어 당시의 성리학자는 우선 중국에서 성리학을 복원하는 것이 지상과제요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 위정에 머물지 않고 척사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과 정책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북벌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북벌론 의식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북벌론 의식은 위정척사의 논리로 다듬어지면서 척사의 상대도 청나라에서 천주교로, 다시 서양제국주의로, 다시 일본제국주의로 변화해 갔다. 그것은 성리학을 위협하는 객관적·현실적 변화에 따른 변화였다. 그와 같이 위정척사의식은 일시에 형성되어 폭발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북벌론에서 구체화된 사상으로 그 후 실학의 북학론에 맞서, 또 동도서기론이나 개화론에 맞서 계승되어 오다가 일제침략을 맞아 폭발한 것이다. 그것이 전기의병이었다. 그들의 의식과 논리는 조선이 성리학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러한 조선을 침략하는 일제에 항거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감히 의병으로 봉기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전기의병을 척사의병이라 한 것이다. 이 때의 춘추대의는 척사로 이해하였다. 다음에 척사의 주인공을 국왕으로 보았기 때문에 척사의병은 모두 근왕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1283)이러한 위정척사사상에 대하여 백범 김구가 1946년 8월 17일 유인석 묘소를 참배할 때의 추도문에서 흥미롭게 표현한 구절이 있어 소개해 둔다.
“… 華夷의 論과 尊明의 說에 이르러는 민족의식이 了別되기 전이라, 幾百年間 傳襲도 잇스려니와 敵을 排退하기에 급하던 때라 論을 華夷에서 끄러왓스니, 文字 비록 舊를 承하나 敵을 치는 반면, 국가에 대한 忠이 매츠니 우리는 선생의 衷을 깁히 헤치어 皮膜을 넘어 그 內含한 민족적 충성을 洗發코저 하나이다 …”

그렇다고 전기의병이 모두 척사의병은 아니었다. 1894년 갑오왜란을 계기로 일어난 안동의 徐相轍 의진이나 상원의 金元喬 의진은 척사를 전제하지 않고 충군 논리에 입각한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284)김상기,<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즉 이때의 춘추대의는 충군에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성리학 질서가 붕괴되는 위협에 당면하여 척사의병이 비로소 봉기했는데 그때도 강릉의 閔龍鎬 의진, 진주의 盧應奎 의진은 척사보다 충군의식이 앞섰던 경우로 이해된다.1285)권영배, 앞의 책. 그외는 거의 척사의병이지만 춘천·경주·나주의진의 경우처럼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1286)조동걸,≪한말의병전쟁≫(독립기념관, 1989).
―――,≪독립군의 길따라 대륙까지≫(지식산업사, 1995), 59·86쪽.

척사의병의 성격이 가장 강렬한 의진은 柳麟錫의 호서의진과 奇宇萬의 광산의진이라 할 것이다.1287)박민영,<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청계사학≫3, 1986). 그것은 李恒老와 奇正鎭으로 이어진 학통에 연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항로 문인의 봉기가 근래 새로운 연구의 주장대로 왕실 척족의 종용을 받아 봉기했다고 하더라도,1288)오영섭, 앞의 글. 그들의 문서나 구호는 척사논리로 메워져 있었다.

중기의병부터는 구국의병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자라고 해도 성리학이 존립할 국가가 위태로운 형편에 성리학을 위해서도 먼저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전기의병은 유생이 주도했는데 중기의병의 경우에 유림이라고 해도 崔益鉉·閔宗植·鄭煥直의 경우처럼 관료 출신자가 주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중기의병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계기로 일어난 의병에서 비롯된다. 즉, 을사조약의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일의정서나 그 해 8월의 한일협약으로 나타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許蔿·元容八·鄭雲慶 등과 같이 유림일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보다 더 많았던 것은 활빈당 등의 농민운동 조직이 의병으로 전환해 간 경우였다. 1896년 전기의병이 해산한 후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자료에 남학당·영학당·동학당·북대·남대·초적·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때의 농민조직이었다.

그들은 1900년 무렵부터 활빈당으로 정비되어 가다가 1904년부터 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경우가 申乭石 의진이다. 의병으로 전환하기 전의 1896년부터의 남학당·활빈당 등의 농민항쟁을 광무농민운동이라고도 하지만,1289)조동걸,<의병운동의 한국민족주의상의 위치>(≪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39쪽. 광무농민운동의 이념은 반봉건성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으로 표현된 일제의 침략을 맞아 반봉건이 실현될 근거인 국가가 위태롭게 되어 활빈당운동은 의병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이념은 반제국주의적 구국이념이었다.

이와 같이 중기의병에서는 유림의병이었다고 하더라도 전기의병과 같은 척사이념은 부차적이거나 잠복하고 구국이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상하였다. 광무농민운동 조직에 의한 농민의병일 경우는 말할 것 없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농민의병일 경우에는 그 모체가 광무농민운동에서 보인 반봉건성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의병전선에 농민의병의 반봉건 의지가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념상의 특징은 후기의병에서 일반적 성향으로 나타났다. 후기의병은 1907년 7월의 광무황제(고종)의 퇴위와 정미조약(한일신협약) 그리고 8월의 군대 해산 등의 망국사태를 맞아 민족적인 규모의 의병봉기와 더불어 해산군인이 의병전선에 대거 참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이념은 다원적이고 다양하였다. 李康秊·李麟榮·李錫庸처럼 전통 유림의 충군적인 성향도 있었고, 許蔿·閔肯鎬처럼 충군적이지만 근대국가를 지향한 성향도 있었고, 洪範圖·金秀民·延基羽·池龍起·安圭洪처럼 평민의병이 추구하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수많은 의진이 전국에서 항전을 전개했다.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의병이 많았다는 것은 바로 이념이 다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혹은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실, 의병전쟁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논리를 극복하고 새 정치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의병이 근대국가 이념을 확실히 갖추게 되는 것은 전환기의병에 이르러 해외에서 계몽주의자와 함께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성취한 일이었다. 그 때 계몽주의자는 의병의 정의론과 무장방략을 수용하였고, 의병은 계몽주의자의 근대국가 이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의병과 계몽주의자가 연합한 13도의군의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1290)조동걸,<안중근의사 재판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육대학 논문집≫7, 1969).
―――,<안동유림의 도만 경위와 독립운동상의 성향>(≪대구사학≫15, 1978).
윤병석,<13도의군의 편성>(≪사학연구≫36, 1983).

대부분의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한 뒤의 잔여 의병이 식민통치 속에서 항전을 계속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한 말기의병의 이념은 그전의 것을 발전시킬 형편이 못되었던 것은 식민지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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