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1) 금융 지배
  • (2) 폐제문란과 외화의 유통

(2) 폐제문란과 외화의 유통

 일본은 개항초부터 한국의 금융지배를 위해 일관되게 접근하였다. 일본 금융기관이 일찍부터 진출하였음은 물론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부터 개항장에서의 일본화폐의 유통을 허용받았다. 1876년 8월 24일 趙寅熙와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또는 미야모토 오카즈)간에 체결된<韓日修好條規附錄>第7款에는 “일본국 인민은 일본국의 貨幣로서 조선국 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화폐로 일본국 소산의 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조선국 지정의 港에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으며, 일본국 인민은 조선국 銅貨幣를 사용·운수할 수 있고, 양국 인민 사사로이 錢貨를 주조하는 자가 있으면 그 각국의 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라고 규정하였다.008)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編,≪舊韓末條約彙纂(1876∼1945)≫上卷(1964),<韓·日修好條規附錄> 참조.

 개항장에서의 일본 화폐의 자유유통은 한일 양국 화폐의 교환비율인 소위 ‘韓錢比價’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화폐제도가 본위화에 기초한 근대적 화폐화 즉 국제 화폐화가 진전될수록 한국 화폐의 가치는 그 동전이 함유하는 금속의 地金價値로 평가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일본은 개항장내에서의 일본 화폐의 유통 허용에 만족하지 않고, 금융기관의 진출과정에서 전국적인 법화로의 인정 그리고 나아가서 화폐발행권 그 자체의 장악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009)이 과정의 자세한 흐름은 吳斗煥,≪韓國近代貨幣史≫(韓國硏究院, 1991) 참조.

 한편 한국정부는 일본의 금융 침략 과정에서 금융발전의 중요성을 비교적 일찍부터 인식하고 금융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종은 1880년대 중엽부터 청국의 극단적인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외교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에는 외채를 도입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새로이 발행하고자 수 차례 시도하였다.010)吳斗煥,<甲午改革과 外貨流通의 增大>(위의 책), 131∼141쪽 참조. 그러나 그것들은 내부적인 준비부족과 외압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1891년 은본위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신식화폐조례>가 제정, 공포되고 또 소량이나마 이를 위한 銀貨가 주조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의 은화 주조에 그치고 空文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청일전쟁을 계기로 성립된 갑오정권은 1894년 음력 7월 11일 賦稅의 金納化와 함께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갑오정권이 발표한 은본위제의<新式貨幣發行章程>은 1891년의<新式貨幣條例>와 기본골격은 동일한 것이었다.<신식화폐발행장정>은 은본위제도를 표방하여 五兩 銀貨를 본위화로 하도록 하고 보조화로 銀 1兩, 白銅 2錢 5分, 赤銅 5分, 黃銅 1分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화폐제도와 같은 것으로 특히 본위화인 5兩 은화는 그 양목과 품위가 일본의 1圓 은화와 동일하였다.

 고종은 이를 통해 오랜 숙원인 근대적 화폐제도를 수립하고, 금납화와 재정개혁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개항장에서 통용이 인정되고 있던 일본 화폐를 전국적인 범위에서 조선의 법화로 만들고자 하였다.<신식화폐발행장정> 제7조에는 “新式貨幣多額鑄造之先 得暫混用外國貨幣 但與本國貨幣同質同量同價者 始許通行”이라 규정하였다. 이는 당시 개항장을 중심으로 사용되던 은화를 법화로 인정함으로써 정부의 공납에도 그 통용을 인정한 것이었다. 일본이 이 조항을 삽입하도록 종용한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일본 화폐의 법화로의 인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청일전쟁으로 인한 한전의 수요 증대로 나타난 韓錢比價의 등귀와 공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화의 유통을 강제하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수행과정에서 필요한 노동과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지불수단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일상의 상권을 확대하기 위하여 일화의 유통을 강제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를 통해 지방정부 관아의 公錢을 日貨와 교환 이용함으로써 목전의 전쟁수행을 위한 한전수요를 조달하는 편의를 얻었으며, 나아가 일화를 조선의 법화로 사용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신용경제권내로 편입하는 보다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만 법규정상 법화로 인정된 것은 한국 화폐와 同質·同量·同價者인 외국화폐이며, 이에는 은화는 포함되지만 지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규정은 귀금속으로서 일본 은화의 유통을 허용하지만 일본정부의 신용에 기초한 화폐, 즉 지폐의 유통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한국정부의 의지가 명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지폐의 통용을 강제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청일전쟁 과정에서 한국에 산포된 일본 화폐의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으나, 북부지방에서만 600만 円에 달하였다고 하며 그 중에 1/3은 은화, 2/3는 지폐였다고 한다.011)日本外務省 通商局 第一課 編,≪通商彙纂≫ 20, 1895년 6월 25일,<在京城領事館報告 朝鮮國北部巡廻視察復命書>. 남부지방을 고려하면 그 보다도 상당히 더 많은 일화가 산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일본이 불법적으로 지폐를 내지에 산포하자 한국정부는 은화 이외에 지폐나 보조화를 사용하지 말 것을 엄달하였다. 정부는 “외국화폐로 말하면 은화 외에는 公納捧下에 통용하지 말 것”012)度支部 編,≪公文編案≫제4책(奎 18154),<五都八道輪關>.이라든가 “국내에 타국의 銅貨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만국의 통례이므로 지금부터는 화폐통용시 타국의 동화를 일체 사용하지 말 것”013)≪公文編案≫제12책,<五都輪關>. 등을 지시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의 압력 속에 이러한 입장은 후퇴하여 “탁지아문은 지폐를 공납에 사용하지 않는 것을 고시하되 인민 상호간에 수수하는 것은 허락하는 것”014)≪通商彙纂≫, 1894년 12월 8일,<在京城領事館報告>.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 일본은 청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함께 근본적인 화폐제도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폐제개혁 문제는 갑오개혁 당시 그들이 조선에 강압적으로 제시한 내정개혁안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과정에서 韓錢代用證券의 발행을 시도한 바 있고, 이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조선에서의 은행 설립 및 지폐 발행을 구상하였다.

 특히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갑오개혁을 위한 300만 円의 차관제공 문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兌換紙幣로 대여하되, 일본의 태환지폐를 한국의 법화로 통용시키고, 조선정부는 일본에서 공채를 모집하여 그것을 상환하되 공채 상환시까지 독자적인 지폐류를 발행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나 갑오정권은 일관되게 일본 지폐의 유통을 반대하고 독자적 지폐 발행과 금융기관의 설립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개화파는 갑오개혁시에 목전의 급무인 賦稅金納化를 위한 손쉬운 화폐 송금의 방법을 열기 위해서도 근대적 본위화나 지폐의 발행 그리고 은행의 설립 등이 긴요한 사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의 지폐 통용 요구에 완강히 저항하였던 것이다.015)吳斗煥, 앞의 책, 142∼146쪽 참조.

 그러나 갑오정권은 일본 지폐를 공납에 사용하는 것은 거부할 수 있었지만 통용이 허용된 일본 은화의 신용에 기초하여 민간에 일본 지폐가 통용되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 이 결과 청일전쟁 전후에 은화와 함께 대량의 지폐가 유통되었으며 그 회수 과정에서는 대량의 일본 상품이 휩쓸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은화만이 법화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한편 한국정부는 일본 지폐의 법화로의 유통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국내 화폐제도는 문란상을 더하고 있었다.<신식화폐발행장정>은 은본위제도를 규정하고 있었지만 규정된 본위화인 5량 은화의 발행량은 2만 元(=10만 냥) 미만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은본위제도는 시행될 수 없었던 반면에 정부는 재정난 가운데 주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백동화만 남발하여 폐제문란을 초래하였다.

 백동화의 주조방법은 엽전과 달리 圓形의 白銅地金에 壓印을 하는 소위 打出法에 의한 것이었다. 정부는 초기에 원형의 백동지금을 수입하고 거기에다가 수입한 極印銅鐵로 押印을 하는 방법으로 백동화를 제조하였다. 그러나 늦어도 1900년 용산전환국 설립 이후에는 백동지금의 용해에서부터 원형의 지금을 만들고 거기에 압인을 하여 成貨를 만들기까지의 모든 공정을 국내에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백동화를 주조하는 데는 1枚에 5分(日貨 기준으로 1錢) 미만의 비용 밖에 들지 않는 데 비해서 그 액면가격은 한화로 2錢 5分(日貨로는 5錢에 해당)으로 규정되어 만약 백동화의 유통가치가 그 액면가치를 유지한다면 10원의 비용으로 최소 50원의 백동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50원의 백동화를 주조하면 40원의 주조 이익이 생기는 것이므로 한국정부는 백동화 주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표 2>는<신식화폐발행장정>에 의한 화폐주조액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표 2>의 숫자는 전환국에 의한 주조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외의 방법에 의한 발행, 즉 私鑄·黙鑄·特鑄 등에 의한 것과 위조화의 밀반입 등에 의한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표에 의하면 은화 주조액은 五兩·一兩을 모두 합해도 19만 원에 불과하고 백동화가 주로 주조되었는데 특히 용산전환국 시절부터 남주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五兩銀貨 半圜銀貨 一兩銀貨 新五錢分 白銅貨 赤銅貨 黃銅貨 合 計
인천전환국
1892. 12∼93. 1
1894. 7∼95. 11
1896. 1∼97. 12
1898
1899
1900. 1∼00. 8

19,923




 
 
70,402


35,788
62,991
 
 
36,953
175,769
51,473
317,283
1,281,637
1,336,335

67,186
236,571
307,506
277,500
34,202
 

888
4,212



 
 
19,923   169,182   3,199,452 922,966 5,101 4,316,625
용산전환국   916,337   124,710 13,531,521 103,715   14,676,283
총 계               18,992,908

<표 2>인천 및 용산전환국 화폐주조액 (단위:元)

*1. 三上豊,≪典圜局回顧談≫(발행지 불명, 1932)에서 작성.
 2. 新五錢分은 白銅鷲貨로 생각된다.
 3. 單位미만은 切捨했기 때문에 計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음.

 악화인 백동화는 급속히 그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화폐유통권의 분할과 인플레이션의 초래 그리고 그에 따르는 상거래의 교란 등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다. 백동화는 관리의 급료, 정부의 物資購入代로 경인지방에서 발행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유통구역도 초기에는 경인지방에 편재된 상태였다. 그러나 1899년경부터 백동화의 多鑄로 그 가치하락이 나타나면서 경인지방을 중심으로 백동화 유통구역이 점차 확장되어 경기 일원과 충청, 황해도 일부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1901년경부터 公納에 적·백동화를 사용함으로써 그 유통구역이 더욱 확대되어 경기도, 충청남북도 및 황해도의 전부 그리고 강원도 및 평안도의 일부에까지 그 유통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상·전라의 양남 및 함경도 지방은 엽전 전용지역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엽전 유통구역과 백동화 유통구역의 분할은 시장권의 분할을 초래함으로써 상업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한편 악화인 백동화의 유통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고 있었다. 보조화라 하더라도 백동화의 발행량이 그 수요에 적절하게 규제되고 위조화의 유통이 금지될 수 있었다면 백동화가 법정가치를 유지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백동화는 정부에 의한 주조 외에 特鑄·黙鑄·私鑄 및 僞造貨의 반입 등으로 다양한 종류의 것이 과도하게 유통되었다. 이 결과 1902년 당시 제물포에서 유통하는 백동화 중에는 ①정부 주조의 백동, ②일등급의 위조화, ③중간의 위조품, ④어두워야 통용되는 것 등이 있었으며, 그 종류가 官鑄 16종·사주 560종 도합 576종에 달하는 문란상을 빚게 되었다.016)British Consular Reports, 1902, 86쪽. 이 과정에서 백동화의 유통가치는 그 地金價値에 가깝게 하락하고 따라서 ‘韓貨比價’가 하락하고 인플레가 초래되었다.

 ‘한화비가’의 하락과 인플레이션은 한국 상인의 화폐자산을 수탈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日商들도 이 과정에서 언제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일상들은 백동화 인플레이션의 과정에서 사주나 위조화의 반입을 통해 불법적인 주조이익과 환투기의 商利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화폐가치의 불안정과 換리스크의 증대는 안정적 상거래를 저해하고 자본투자를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화비가’의 하락은 조선 소비자의 구매력을 감소시켜 수입물자의 판로에 장애가 되었다.

 한편 일본이 1897년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여 한국의 법화의 한 종류로 통용되던 1円 은화가 폐지되자 일본은 한국에서의 무역화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은화의 일본 환류를 늦추고 그것에 각인을 한 刻印附銀貨를 한국에 유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은화는 이후에도 발행이 중지되어 유통고가 감소하고 의화단사건으로 모두 유출되어 자취를 감추고, 덧붙여 일본은행태환권도 점차 회수되어 1900∼1901년경에는 청상이 발행한 錢票, 일본 상인이 발행한 韓錢預託어음, 관주·사주의 백동화 등이 시장에 濫溢하여 거래의 위험을 설명하기 어렵고, 한국 해관에서는 圓銀·墨銀·日本貨幣로 해관세를 징집하는 규정이므로 불편을 느끼는 바가 특히 심하였다.017)長谷川天代松 編, 앞의 책, 87∼88쪽.

 따라서 일제는 독자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함으로써 한국의 화폐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제일은행은 1900년경부터 그 발행을 구상하여 1901년 11월 일본대장성의 허가를 받고<株式會社 第一銀行券規則>을 제정하여 한국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1902년 5월 부산을 시초로 국내에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제일은행권은 拾圓·五圓·壹圓의 세 종류이고, 최초로 제조한 것은 세 종류 합하여 130만 圓이었다. 그리고 표면에 ‘이 권면의 금액은 在한국 각 지점에서 일본통화를 가지고 태환함’이라 되어 있고 일본은행태환권을 준비로 발행되었다.

 제일은행권은 일본의 일개 사립은행인 제일은행이 본국이 아닌 해외에서 一覽拂約束於音으로 발행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동안의 일본 화폐의 신용과 일본의 금융기관 및 상인들의 영업활동에 기초하여 마치 은행권과 같이 융통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경제주권의 하나인 화폐발행권을 현저히 제약하는 것인 만큼 한국정부와 상인들의 수수거부투쟁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측의 움직임과 다른 한편으로 한국정부는 근대적 본위화제도의 수립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정부는 백동화 남발로 인한 폐제문란을 해결하면서 또 다른 화폐발행 이익을 얻기 위해 1901년 금본위제도의<화폐조례>를 공포하였다. 그리고 1903년에는<중앙은행조례>와<태환금권조례>를 제정하여 중앙은행제도를 마련하고 금본위지폐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인 본위화제도의 수립 노력은 地金준비에 필요한 차관 도입의 실패로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이 한국정부의 차관 획득 노력을 방해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한국측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 못한 가운데 일본은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천의 紳商協會를 비롯한 한국의 상인들이 그 수수반대를 결의하는 가운데, 정부는 1902년 9월 “일본지폐에는 정부발행이라는 글자가 있지만 이 태환권면에는 정부라는 글자가 없을 뿐더러 재한 각 지점 등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이는 한국에서 유통되는 것이오, 일본의 통화가 아니니” 그 수수를 거절하도록 고시하였다.018)≪仁川皆訓≫, 1902년 9월 11일, 訓令 제64호.
≪通商彙纂≫38호, 1904년 5월 27일,<在京城帝國領事館報告>.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였고 나아가 조세 기타의 공납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019)“금회의 철회 훈련 중에는 諧券의 유통을 도모할 것이라는 명령을 추가함으로써 그것을 근거로 我貨幣를 조세 기타 공금의 납부에 공연히 사용하도록 하는 길을 열려는 것을 심히 중요시하지만 사정이 전술과 같으므로 我公文으로 그 철회를 약속시킨 것만으로 만족하고 운운”(≪駐韓日本公使館記錄≫,<第一銀行一覽拂手形發行に關する件>, 電 명치 36년 정월 23일). 그러나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상민의 수수거부가 지속되고 한국정부의 내면적인 반대가 계속되자 일본정부는 1903년 2월 高砂號를 비롯한 군함 3척을 서해안에 파견하여 군함외교로서 그 뜻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한국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2월 12일 제일은행권의 수수를 임의에 맡기는 내용의 고시를 하였고020)≪仁川皆訓≫, 1903년 2월 12일., 이로써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제일은행권의 통용을 허용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정부의 유통허용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간의 제일은행권 수수반대운동은 보다 활발해졌고 그 결과 현실적으로 제일은행권의 유통이 확대되지 못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인천의 신상협회, 宋秀萬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共濟會 등의 반대운동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제일은행권의 유통확대는 바로 화폐발행권의 침탈 즉 경제주권을 장악하는 과정이므로 그에 대한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다. 역으로 일본의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화폐발행권을 장악하는 것은 정치적 주권의 제약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이는 러일전쟁 후 한일협정의 체결을 기다려야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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