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1) 금융 지배
  • (3) 화폐정리사업

(3) 화폐정리사업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1904년 8월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그에 따라 연말에 일본 대장성의 主稅局長이었던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고문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일본정부와의 협의하에 1905년 조선 재정 전반의 식민지화와 화폐정리를 추진하였다. 화폐정리사업은 幣制紊亂의 직접적 원인인 백동화를 환수하고 엽전을 점진적으로 정리하는 것과 함께, 보다 중요한 것은 제일은행권을 조선의 법화로 하는 화폐발행권의 장악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은 구화의 정리사업임과 동시에 새로운 식민지 통화제도의 수립과정이었다.

 그는 화폐정리의 기본방침으로서 ①한국 화폐의 기초 및 발행 화폐를 일본과 같게 하고, ②한국 화폐와 동일한 일본 화폐의 유통을 인정하며, ③본위화폐 및 태환권을 일본의 것으로 하거나 또는 일본태환권을 준비로 일본정부의 감독 및 보증에 의해 발행된 은행권으로 할 것, ④보조화폐는 한국정부에서 발행할 것 등을 정하였다.

 한국정부는 메가타의 영향 아래 1905년 1월 칙령 제2호로 1901년의<화폐조례>를 1905년 6월 1일부터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1901년의<화폐조례>는 앞서 본바와 같이 일본과 동일한 금본위제 화폐제도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칙령 제3호로<화폐조례>의 실시에 있어서 동 조례에 규정한 화폐와 품위, 양목 및 형체가 동일한 화폐는 국내에 無礙 통용하고 公私 수수에 사용할 것을 공포하였다. 또한 칙령 제4호로<舊貨幣의 교환, 회수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어 구화 銀 10량은 新貨 金 1圜에 상당하는 比額으로서 정부의 편의에 의해 점차 교환 또는 환수하며, 舊白銅貨의 교환 및 환수는 7월 1일부터 개시하고, 교환 종료기간은 만 1개년 후로 하며, 기한 종료 후는 그 통용을 금지하고, 단 통용금지 후 6개월간은 공납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021)澁澤榮一,≪韓國貨幣整理報告書≫(第一銀行, 1909), 27∼33쪽.

 그러나 유의할 것은 한국민에게 공포된<화폐정리사업에 관한 규정>은 표면적으로 1901년의<화폐조례>에 제시된 금본위제를 실시할 것을 표명했지만 사실은 제일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든 기초 위에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본위화로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메가타는 이를 위해 우선 1904년 12월에 탁지부령 제2호<金庫出納役設置件>을 발령하여022)宋炳基·朴容玉·朴漢卨 編,≪韓末近代法令資料集≫3(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1), 707∼708쪽. 제일은행을 금고출납역으로 규정하였다. 이어서 화폐정리사무에 관한 계약서를 마련하여023)≪韓國貨幣整理報告書≫, 37∼39쪽.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화폐정리사무를 집행시키고, 제일은행권을 법화로 인정함과 동시에 공사의 거래에 무제한으로 통용시키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일은행은 한국의 국고금 취급 및 법화 발행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제일은행권의 발행과 유통과정이 침략적 과정이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최초의 발행과정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외에도 제일은행권이 러일전쟁과정에서 군용수표의 대용화폐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비조달을 위해 즉각 은을 본위로 하는 수종의 군용수표를 한국과 만주에서 발행하였다. 그러나 군용수표는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고 일본 병사가 압제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여도 한국인은 이것을 수취하자마자 다른 화폐와 교환하려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군용수표로 표시되는 물가가 높아지고 화폐가치가 떨어지자 일본정부는 그 발행을 정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게 되었다. 제일은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히려 전쟁에 수반하여 평양 기타 북방지방에 지점을 개설하였으며, 이제 일본정부는 군용금을 제일은행을 통해 송부하고 제일은행은 그 지점에서 제일은행권을 사용하도록 하여 군표를 회수하고자 하였다.024)京城高等商業學校,≪韓國における貨幣と金融≫上 (1909), 118쪽. 이 과정에서 제일은행권은 그 유통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후 1905년에 메가타에 의해 한국의 법화로 인정되는 것이다. 실로 초기의 제일은행권은 군용화폐적 성격을 가지고 유통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폐정리사업은 일종의 군용화폐로서 제일은행권의 유통이 확대되는 다른 한편에서 그것을 공식적으로 한국의 법화로 만드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1905∼1909년간 정리의 주된 대상인 백동화는 교환·납세·매수 등의 방법으로 총 1,905만여 원이 환수되었다. 엽전도 納稅·買收·輸出 등의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환수되었다. 그 대신에 발행이 증가된 것은 법화인 제일은행권을 비롯하여 보조화인 신백동화였다.

 백동화 환수로 대표되는 화폐정리사업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진 것이었다. 첫째로 舊貨 2元을 新貨 1圜과 교환한다는 규정은 당시의 백동화의 유통가치가 법정가치의 반 정도에 불과하였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여하튼 화폐당국이 구화의 법정가치를 무시하고 악화 발행의 책임을 인민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둘째로는 사업과정에서 錢慌이 초래되고 조선상인의 다수가 파산한 것이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위조 백동화가 많은 현실에서 일본인 주도의 화폐정리사업에서 그들의 백동화가 갑종이 아닌 을종이나 병종의 판정을 받아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조선인은 백동화를 放賣하여 부동산을 구입함으로써 유동성이 결핍되는 현상이 생겼다. 여기에다가 화폐개혁 과정에서의 어음시장의 혼란, 外劃의 폐지, 新貨發行의 지체 등이 겹쳐 전황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종로 상인을 비롯한 조선상인의 다수가 파산하는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후 일제는 共同倉庫會社, 어음조합, 지방의 농공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통화의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조선의 통화발행권을 장악하고 식민지 금융기구를 확립하여 갔다. 전체적으로 화폐정리사업은 구래의 한화를 폐지하고 식민지 통화제도를 수립하면서 그에 수반하여 새로운 금융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조선정부로부터 경제 주권의 주요 내용 중의 하나인 화폐발행권을 탈취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상 살핀바와 같이 개항기를 통해 한국에서의 식민지 금융제도의 성립과정은 두 가지의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나는 금융기관의 진출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화폐의 유통 증대와 화폐발행권의 장악 과정이다. 물론 이 두 과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수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일본의 제일은행이었다. 제일은행은 상업금융기관으로서 한국에 진출하였으나 곧 일본정부의 정책자금을 공여받아 금매입 등의 특수 업무를 취급하였고, 한국정부에도 접근하여 한국의 관세금 취급은행이 되고 나아가서 정부에 貸上金을 제공하기도 하면서 재정자금을 이용하는 금융기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제일은행을 비롯한 외국의 금융기관이 활발한 영업활동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 외국화폐가 유통되는 가운데, 한국의 국내사정은 개혁의 주체가 뚜렷이 형성되지 못한 가운데 화폐제도가 문란하였다. 국내적인 폐제문란의 주된 원인은 재정궁핍 가운데 악화를 발행한 데 있었다. 청일전쟁 이전의 당오전 발행에 이어 이후의 백동화 남발로 이어지는 악화의 발행 과정에서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화폐유통권이 분할되며 외국화폐가 유통되는 등의 기현상이 속출하였다.

 물론 한국정부도 이러한 화폐제도의 문란을 바로잡고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마련함과 동시에 금융제도를 정비하고자 하였으나 직접적으로는 본위화 마련을 위한 차관도입의 실패로, 그리고 보다 넓게는 근본적인 개혁의 미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폐제문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특히 일본은 한국에서의 근본적인 식민지 금융제도의 마련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국 금융의 식민지화의 직접적인 단초는 1902년 최초로 발행된 제일은행권을 1905년의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의 법화로 만드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1905년의 화폐정리사업은 엽전·백동화 등의 구화의 정리가 그 중심 내용이었다기 보다는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법화로 만드는 식민지 금융제도의 마련이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화폐개혁은 제일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고 기타 다양한 금융기관을 정비하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때에 만들어진 제일은행권제도는 이후 조선은행권제도로 흡수되어 식민지기간 내내 한국의 화폐제도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한국의 식민지 통화제도는 제일은행권(후의 조선은행권)을 일본은행권과 연결시킴으로써 일본 기업의 상업거래와 투자를 원활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일본은 이를 위해 상당히 교묘한 제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에 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의 금을 흡수하면서 일본과 화폐의 등가관계를 유지하는 은행권제도를 창설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025)吳斗煥, 앞의 책 참조.

<吳斗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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