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2) 차관 제공
  • (1) 차관, 무엇이 문제인가

(1) 차관, 무엇이 문제인가

 차관은 외국 자본의 일종인데, 이 外資에는 직접 투자, 증권투자, 기술이전 그리고 차관이 포함된다. 借款이란 款, 즉 돈을 빌린다는 뜻이며, 영어로는 foreign loan 그러니까 ‘외국에서 빌린 돈’을 말한다. 이 용어는 중국에서 19세기 중엽부터 유행되기 시작했으며 조선과 일본으로 퍼져나간 외래단어이다.

 차관은 물론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대포와 군함을 앞세운 자본주의 선진국이 상품 수출, 원료·식량공급을 손쉽게 하기 위하여 非자본주의 세계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다. 이른바 불평등조약망이 전세계를 얽음으로 해서 형성된 ‘불평등조약체제의 世界化’에 기반하여 차관제공도 전 지구로 확대되어갔다. 선진국의 낯익은 상품수출에 뒤이어 등장한 차관제공은 새로운 자본주의 침략의 낯선 괴물이었다. 차관제공은 상품수출의 파괴력을 훨씬 능가하게 되었다. 약소국의 사회경제구조를 왜곡·재편하는 단계를 넘어 반식민지→보호국→식민지로 이끌어 가는 기본동력의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차관의 이 부정적인 파괴력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바로 차관제공을 통해서 획득하는 초과이윤과 각종 이권의 침탈과 함께 재정권을 장악함으로 해서 결국 차관도입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그 파괴력이 존재한다. 이 차관의 수익성과 침략성 때문에 선진자본주의국가는 물론 후발 자본주의국가도 약소국에 대한 차관제공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차관제공을 ‘차관공세’로 부르며, 1880년대 초 상품수출도 버거운 청과 일본이 차관공세에 관심을 가졌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러함에도 약소국이 차관도입을 강행한 까닭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그 도입을 꺼리면서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만성적인 재정적자 상태에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근대화정책(개화정책)에서 발견된다. 구체적으로 조선의 예를 보자.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 이후부터 조선의 조정은 ‘준비 없는 개국’을 갑자기 강요받았기 때문에 무지와 당황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당장 들이닥친 외교·무역·해관·관세·전선·철도·우체국 등 모두가 신비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행정기구도 창설해야 하며 군대조직도 재편하고 더구나 필요한 것은 각 부문의 전문가를 해외에서 찾아와야 했고 유학생을 파견해야 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1882년의 국가재정은 한 달을 버티기가 어려웠으며 1895년의 경우 총예산 가운데 9% 만이 국내에서 조달될 정도였다. 부족한 예산에서 개화정책을 진행시키자니 차관의 유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또 다른 유혹은 부정부패가 제도화된 당대 고종과 민비, 관료들에게 차관의 도입은 재산을 증식시키는 또 하나의 도깨비 방망이였다.

 차관도입의 공개된 함정은 어디에 놓여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

 차관제공국과 도입국은 차관 계약서[合同]를 체결하는데, 그 계약서 내용에는 차관금액, 이자율, 인출 방법(인출 시기·화폐 종류·인출 장소), 원금·이자(원리금) 상환방법, 담보물설정, 부수조건 등이 포함된다. 그 함정은 담보물설정과 부수조건 속에 놓여있다. 원리금상환이 지연되거나 불가능할 경우 설정된 담보물, 예컨대 해관세·조세·광산세·인삼세 등등은 제공국에게 탈취당하거나 지배당하게 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담보물을 하나로 정하지 않고 이중 삼중의 순차담보로 설정하는 제공국의 치밀성이다. 해관세가 부족하면 광산세로 또 이것이 부족하면 인삼세로 그 원리금상환이 옮겨간다. 원리금상환의 지연 또는 불능은 눈독들여 왔던 도입국의 담보물을, 제공국이 빼앗는 계기로 삼는다. 조세의 경우 대부분의 조세가 원리금상환으로 전환되어 국가재정의 파산을 선고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함정인 부수조건은 차관의 제공대가로서 차관계약서 체결과 동시에 효력을 갖는 이권탈취의 한 제도적 장치이다. 예컨대, 관세징수권·해관운영권·상품수출권·무기공급권·철도가설권·전신가설권·광산개발권·식량수입권·산림벌채권·어로채취권 등등을 차관제공의 대가로 탈취해갔다. 때문에 정부가 차관도입을 결정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은 최소한도 원리금 상환능력의 보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원리금 상환의 능력이 있으면 차관은 약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즉각 ‘독’이 되고 만다. 지속되는 독의 악순환은 외채의 노예국을 재정 파산의 망국, 그러니까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몰고 가는 견인차였음을 조선의 역사도 예외없이 보여주고 있다. 차관망국론, 외채식민지론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서 조명된다.

 중층적인 借款毒의 악순환은 민족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차관도입은 외세저항의 민족주의를 촉발시킨 하나의 도화선이었다. 계속되는 원리금상환의 적체는 고스란히 조세의 증가로 나타나 한계선상에서 허덕이는 농가경제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또한 잇달아 빼앗긴 이권은 수공업자와 민족기업가를 파탄의 수렁으로 밀고 갔으며, 탈취된 이권의 현장에서는 민족차별과 저임금의 민중생존권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몰락하고 파탄, 파괴당하는 현장에서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반봉건투쟁의 봉화가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전쟁으로, 다시 국채보상운동으로 확대되는 차관이 빚은 민족항쟁의 증폭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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