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3) 철도 부설
  • (2) 일본의 침략과 철도 부설

가. 경인선 권리의 매수와 부설 공사

 일본정부와 자본가들은 한국에서 우세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인선의 장악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오스가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인철도 부설권을 매수하기 위해 먼저 京仁鐵道發起委員會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 政商資本家들인 이와사키 야노스케(岩崎彌之助)·미츠이 하치로지로(三井八郞次郞)·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야스다 젠타로(安田善太郞) 등을 중심으로 1897년 5월 4일 京仁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하였다.077)≪仁川府史≫, 825∼826쪽. 시부사와 등은 모오스와 집중적인 협의를 거쳐 동년 5월 8일 京仁鐵道讓受契約을 체결하였다.078)龍門社 編,≪靑淵先生六十年史≫2 (1900), 337∼350쪽. 이보다 앞서 일본의 중의원과 귀족원은 이미 경인선의 부설에 필요한 자금 180만 엔을 일본정부가 組合에 貸下하도록 가결해 준 바 있었다.079)明治財政史編纂會 編,≪明治財政史≫2 (1926), 619∼625쪽. 그리하여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대한제국정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미국인과 일본인의 매매계약에 따라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한국철도 침탈이 본격화하게 되었다.

 모오스가 경인선의 부설권을 매각했을 때 철도의 土工工事는 반정도, 한강의 교량공사는 2개의 橋臺와 3개의 橋脚을 세운 정도로 진척되어 있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모오스의 공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1899년 4월 8일 토공공사에 착수하고, 동월 23일에 인천에서 새롭게 기공식을 거행하였다.080)≪仁川府史≫, 836∼838쪽. 그리고 조합의 조직을 京仁鐵道合資會社로 일신하였다. 1899년 5월 15일부로 개편된 이 회사의 자본금은 72만 5천 엔, 사원은 15명이었다.081)≪朝鮮鐵道史≫(1929), 49∼51쪽.

 경인철도합자회사는 인천에서 西大門에 이르는 전 구간을 4工區로 나누어 공사를 진행하였다. 전 구간을 시공한 것은 일본의 토목건축업자인 가지마구미(鹿島組)였다. 건설기간은 인천-노량진 선로공사에 6개월, 한강 교량공사에 1년 3개월, 한강-남대문 선로공사에 1개월 정도가 각각 소요되었다. 모든 공사가 일단 완료되어 노량진 정거장에서 개통식을 거행한 것이 1899년 9월 18일이었다. 개통 당시의 열차운행은 인천과 노량진에서 오전·오후 각각 1회씩 발차하도록 되어 있었다. 兩端間의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었다.082)≪朝鮮鐵道史≫(1929), 58∼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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