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4) 해운업 침투
  • (2) 열강의 해운업 진출과 대외항로(1883∼1894)

가. 조선의 해운정책과 열강의 해운업 진출

 일본의 해운독점은 1882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朝美修好通商條約>, 1883년<朝英修好通商條約>등 조선이 청·구미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무너졌다. 청·영국·독일·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연안해운권과 연안무역권을 획득하여 해운업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는 외국기선의 出航을 유도하려는 조선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1880년대 전반기에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1880년대에 들어와 근대화정책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교통운수의 발달을 위해 기선 등 근대적 운송수단의 도입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2년 11월 정부는 “각국과의 통상시 민간인이 火輪船과 風帆船을 구매하여 公私에 쓸 수 있도록 하라”147)≪日省錄≫, 고종 19년 10월 14일.고 舟橋司에 지시하여 민간인이 외국선박을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정부는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하 통리아문으로 줄임)의 산하에 郵程司를 두어 통신과 수륙교통에 관한 업무를 담당케 하고 관영 및 민영회사의 설립을 권장하였다. 기선의 도입은 당시 재정난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던 漕運制度를 개선하는 방안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京江船 등 재래선박은 난파가 잦아 租稅上納의 지체를 가져오므로, 견고한 기선으로 대체하여 稅穀을 수송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야 할 만큼 재정이 궁핍하였기 때문에 자본이 많이 드는 기선 해운업을 착수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정부는 우선 외국의 기선회사와 계약을 맺어 조선 해역에 기선을 정기 운항하도록 유도하고 그 기선으로 세곡과 무역품을 운송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은 개항 이후 독점적으로 조선 근해의 해운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의 해운업을 견제하고 무역을 진흥시킬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148)羅愛子,≪韓國近代海運業史硏究≫(國學資料院, 1998), 59∼66쪽.

 마침 1883년 인천의 개항 후 청에 진출한 영국과 독일 商社들이 인천거류 청국상인의 지원을 받아 인천과 청·일본을 연결하는 정기항로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먼저 1883년 8월 영국의 怡和洋行(Jardine Matheson & Co.)은 통리아문 參辦 묄렌도르프(P. G. Möllendorf, 穆麟德)의 주선으로 상해-나가사키간 항로(부산·인천 경유, 월 2회 운항)를 열었다. 이화양행은 그 해 11월부터 항해 적자시 조선정부로부터 海關稅에서 절반을 塡補받는다는 조건으로 1년간 세곡을 수송하기도 하였으나, 적자운항을 이유로 1년만에 항로를 폐지하였다.149)孫兌鉉,<舊韓末의 官營汽船海運에 關한 硏究>(≪東亞論叢≫7, 東亞大, 1970), 189∼195쪽.

 1885년 3월에는 독일의 世昌洋行(E. Meyer & Co.)이 인천거류 청상과 독일상인의 자금지원을 받고 조선정부의 세곡을 운송하기로 하여 상해-인천간 항로를 개설하였으나, 불과 6개월만에 기선운항을 중단하였다. 1886년 3월 세창양행은 차관제공의 대가로 다시 세곡운송권을 얻어 상해-인천간에 기선을 운항하였으나, 이듬해 봄에 중단하였다. 그 이유는 두 차례 모두 조·청간의 무역이 부진한데다 조세상납 담당관리 및 京江船人 등 賃運業者의 반발과 방해로 세곡운송이 순조롭지 않아 적자운항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기선에 의한 조운에 실패하고, 3만 석의 세곡수송량을 보장하기로 한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해 세창양행에 3,500원의 위약금을 지불하여야 했다.150)金正起,<朝鮮政府의 獨逸借款導入(1883∼1894)>(≪韓國史硏究≫39, 1982).
李培鎔,<開港以後 獨逸의 資本浸透와 世昌洋行>(≪韓國近代鑛業侵奪史硏究≫, 一潮閣, 1989).
羅愛子, 앞의 책, 78∼86쪽.

 한편 조선정부는 1884년 6월 일본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미국 미들톤상사(Middleton and Co.)의 대리인과 기선회사를 설립하기로 계약을 맺었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때 정부는 미국상선에 세곡 등 관용화물의 수송특권을 주되 민간인의 회사가입을 권장하여 민간자본을 유치하고, 회사운영과 수익금의 분배에 정부가 일정하게 참여하면서 재정형편이 나아지면 선박과 기구 등을 구입하여 직접 기선을 운항하려고 하였다.151)≪美案≫1(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10), 고종 21년 윤 5월 19일,<附汽船會社設立合約稿本>.
≪書契所報關錄≫2(奎 18104), 乙酉 정월 12일 到付<大朝鮮國政府特準與美國密得頓英國克利布設立汽船會社訂定商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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