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5) 이권 탈취
  • (1) 광산이권과 광업법

(1) 광산이권과 광업법

 1895년 이후부터 한국정부는 속수무책으로 열강들에게 광업이권을 차례로 빼앗기게 되었다. 열강들은 대체로 광지를 정하지 않은 채 우선 특허권을 얻어낸 다음 2년내에 광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단지 궁내부소속 광산 몇 개소만을 지정하여 보호하였을 뿐 한국전역에 산재한 광산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다.221)宋炳基 外,≪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국회도서관, 1971), 광무 2년 6월 28일. 심지어 열강들은 이러한 한국정부의 허점을 이용하여 광처를 선정하기 위해 시굴한다는 명목으로 아무 곳이나 파헤쳐 보고, 만일 그곳에서 금이 나오는 경우 세금을 납부하지 않음은 물론 정식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채굴을 감행하여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광산이권은 조선과 조약을 맺은 모든 열강과 관련되어 있어 이권침탈의 특성을 가장 포괄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열강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금광이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로 조선에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둘째로 금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무역의 결제수단과 화폐발행의 준비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열강은 다른 이권보다도 금광이권 문제를 둘러싸고 오랜 시일에 걸쳐 끈질기게 한국정부에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880년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최혜국조관을 내세우며 대부분 일정지역의 금광채굴권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우선 광산채굴권을 요구하여 광업 전반에 걸쳐 특허권을 확보한 다음, 정작 채광에 임할 때에는 주로 금광개발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1895년 미국에 평안북도 雲山金鑛 채굴권을 양여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96년에는 러시아에 慶源·鏡城鑛山 채굴권을, 1897년에는 독일에 광산채굴권을(鑛地는 1898년 강원도 堂峴金鑛으로 확정), 1898년에는 영국에 광산채굴권을(광지는 1900년 평안남도 殷山金鑛으로 확정), 1900년에는 일본에 稷山金鑛 채굴권을, 1901년에는 프랑스에 광산채굴권을(광지는 1907년 평안북도 昌城金鑛으로 확정), 1905년에는 이탈리아에 광산채굴권을(광지는 1907년 평안북도 厚昌金鑛으로 확정) 넘겨주게 되었다. 열강은 조선과 광산특허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우만 광지를 선정하고 계약문을 작성하였으며 다른 열강의 경우는 모두 우선 광산채굴 특허권만 확보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뒤에 광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222)李培鎔,≪韓國近代鑛業侵奪史硏究≫(一潮閣, 1989).

 열강이 1895년 이후 조선의 광산이권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은 개항 이후로 외교관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광산 기술자까지 조선에 파견하여 광산의 실태를 탐지한 결과였다. 열강은 이들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을 선정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다른 열강들보다도 조선광산에 대한 더욱 치밀하고 계획적인 조사를 하였을 뿐 아니라 광산기술자까지 파견하여 광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 동시에 광지 선정도 가능하였던 것이다.

 열강이 침탈한 광산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수익을 거둔 것은 미국인이 채굴한 운산금광이었다. 미국은 다른 열강보다 한국정부로부터 신임을 얻어 수월하게 이권교섭을 전개할 수 있었다. 우선 1880년대 후반기에 이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1895년에는 정식으로 한국정부와 운산금광 채굴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雲山鑛約>내용이 본보기가 되어 다른 열강도 그것을 토대로 채굴계약을 맺었다.

 처음에 운산금광은 미국인 모오스(J. R. Morse)가 朝鮮開鑛會社를 설립하여 채굴시도를 하였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국의 대자본가인 헌트(Leigh S. J. Hunt)와 파세트(J. Sloat Fasset)에게 1897년 3만 불에 양도하였다. 그들은 東洋鑛業開發株式會社(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조직하여 대대적으로 운산금광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광산이 호황을 이루자 왕실 소유주를 모두 일시불에 사들이고 채굴 기한도 15년을 더 연장하였다.223)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 Certificate, May 13, 1898.

 운산금광에서 약 40년간 채굴을 담당하였던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의 경영진에는 한 사람의 조선인도 참여시킴이 없이 미국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금광에서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생산하여 총 5,600만 불의 산출고를 올렸다. 또한 1909년 운산 및 그 부근의 삼림채벌권까지 획득하여 더욱 더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총 경비를 제외한 순이익이 1,500만 불이었으니 쉽게 생각해서 4분의 1의 왕실 소유주를 일찌감치 단 10만 불에 팔아 넘기지 않았으면 조선 왕실이 375만 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여하튼 이로 인한 조선의 경제적 손실은 실로 막대하여 민족자본의 형성기반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1895년에 이르러 미국이 평안북도 운산금광 이권을 획득하게 되자 세창양행을 통해서 이권교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98년 7월 강원도 금성의 당현금광 채굴권을 얻을 수 있었다. 당현금광의 채굴은 함브르크에 있는 메이어 컴퍼니(Edward Meyer & Co.)의 제물포지점인 세창양행에서 대행하였는데, 채굴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현지민과 기존 광업권 처리문제, 토지배상문제, 고용임금문제 등으로 마찰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일측의 태도는 항상 조선에 대한 주권 침해로 귀결되었다.

 독일은 당현금광에 대해 지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한 예로 1899년 하인리히(Heinrich) 황태자가 내한하여 교통편도 좋지 않은 산간벽촌인 당현금광을 방문하였으며, 그 때 서울에서 당현까지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주재하는 독일인 公使, 중국 上海의 총영사, 독일인 간호장교, 신문기자 등 조선을 방문한 독일인들은 거의 당현금광을 거쳐갔다.224)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高麗大 出版部, 1969),≪德案≫2, 문서번호 2068 獨親王 하인릿히公 來韓日程 및 迎接儀禮 條項.
≪독립신문≫, 1899년 6월 9일.
≪皇城新聞≫, 1899년 6월 9·15일.
그러나 독일이 기대하였던 것만큼 당현금광은 성적이 좋지 않아 채굴에 착수한 지 7년 만인 1905년 폐광하고 다른 광산을 대신 요구하여 평안도 宣川鑛山이 다시 독일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1883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곧 광산이권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884년 열강 중에서 최초로 한국에 근대식 채굴기계와 광산 기술자를 파견하여 경기도 永平砂金鑛의 채굴을 시도하였다.225)≪英案≫1, 문서번호 111 萬世橋金鑛의 採掘不准에 對한 異議 및 代鑛准許要請.
≪統記≫, 고종 20년 10월 15·17·21일.
또한 청일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평안도 은산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고, 1900년대에는 일본의 세력을 배경으로 황해도 遂安金鑛 특허권도 얻어내었다.

 영국이 은산금광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물의를 자아냈다. 원래 1898년 9월 영국이 광산채굴 계약을 체결할 당시는 독일의 경우처럼 광산지역을 선택하지 않은 채 특허권만 확보하였다. 그런데 영국은 한국정부가 독일에게 넘기기를 거부했던 평안남도 은산금광을 집요하게 요구하였고, 그리하여 채굴하고 있던 기존의 조선인 광부들과 무력충돌을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주로 일본인 광부들을 고용하여 저항하는 조선인 광부들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영국기를 걸고 방문을 내붙여 그들의 불법점탈을 가중시켜 나갔다.226)≪平安南北道去來案≫(奎 17988-4), 1900년 2월 19일, 보고서 제1호.

 결국 한국정부는 영국의 강압적인 태도에 굴복하여 1900년 3월 은산금광 채굴을 영국에게 허가하였다.227)≪英案≫1, 문서번호 1779 殷礦問題의 妥協案 同意事;문서번호 1780 殷礦開採 允許事.
≪皇城新聞≫, 1900년 3월 19일.
그러나 영국은 큰 기대를 걸고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채굴에 임했던 이 금광에서 약 6년 동안의 채굴기간 동안 처음 1·2년을 제외하고는 큰 수익을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1906년 4월 완전히 작업을 중지하고 대신 평안도 龜城鑛山 채굴권을 요구하였다.

 이와 별도로 영국인 피어스(A. L. Pearse)가 1905년 수안금광 특허권을 획득하였다.228)≪遂安金鑛特許命令書≫(奎 23392·23393). 그런데 수안금광 채굴권은 영국의 단독자본이 아니라 각국이 공동으로 자본을 투자해서 설립한 코리안 신디케이트(Korean Syndicate)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각 열강이 자본을 모아서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공동으로 경영한다든가 서로간의 이익에 따라서 특허권을 양도하기도 하고 특허받은 광산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소위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인데 광산업 투자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여보자는 계책이었다.

 일본은 열강의 이권 침탈 중에서 가장 집요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 국가였다. 처음부터 조선광산에 대한 조사와 정보를 입수하고 교섭을 벌인 결과 1891년 경상도 昌原金鑛 채굴권을 획득할 수 있었으나 별 이득을 거두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다.229)≪日案≫2, 문서번호 2013 昌原金鑛採掘에 關한 日商馬本約章의 確認要請. 1895년 이후에도 철도 등 다른 이권에 비해 광업 부문에는 별 진전이 없다가 1900년에 이르러 충청도 직산금광을 불법 침탈한 후 한국정부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정식 채굴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230)≪稷山鑛約≫(奎 23094). 실제 鑛區를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인들은 교묘한 계책을 발휘하여 광구 획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직산군 일대가 그들의 租界地인 양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파헤치면서 인근 주민들을 괴롭히고 실질적인 수익을 확보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 황실에 매년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광구의 미정으로 소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상납의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일본인들은 직산금광 채굴권 획득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의 조선 전 광산에 불법 침투하여 시굴작업을 감행한 후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정되면 한국정부에 인가를 요청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 인한 폐단을 호소하는 현지 주민들의 진정이 날마다 신문지상에 실릴 지경이었다.

 프랑스는 1901년 광산특허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광산지역 선정 문제로 오랫동안 한국정부와 논쟁을 벌이다가 1907년 평안도 昌城金鑛으로 광지를 확정하였으며, 1928년까지 채굴하여 막대한 수익을 거두어 갔다.231)≪法案≫2, 문서번호 1346·1356·1362·1448·1449. 이태리도 일본 세력에 의존하여 1905년 광산채굴계약을 한국정부와 체결하였다. 광지 선정문제로 논란이 거듭되다가 1907년 厚昌鑛山을 얻어내었는데 1911년 이후 포기하고 말았다.232)≪農商工部去來文≫(奎 17782), 1907년 8월 30일.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광산이권을 획득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6년부터 몇 년 동안 조선에서 유리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였던 관계로 광산이권 뿐 아니라 매우 광범위한 경제적 독점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233)國會圖書館 立法調査局 編,≪舊韓國條約彙纂≫下(1965), 465∼468쪽.
≪慶源·鏡城 兩處의 鑛山採掘權을 准許하는 契約書≫(奎 23267).

 열강은 조선광산을 채굴하면서 대체적으로 砂金鑛 보다는 石英鑛(岩金鑛)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대체로 사금광은 재래식 德大制를 이용하여 세금을 받는 형식이었다. 열강은 한결같이 조선인 광부들에 대해 저임금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주변 주민과의 여러 가지 분쟁을 초래하였다. 이를테면 토지배상문제라든가 인근의 삼림을 마음대로 벌채하여 원성을 자아냈다. 이러한 열강들의 불법적인 처사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열강은 강압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점차 외국인에 의해 채굴되는 광산 주변은 특수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열강들이 한국광업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을 때 한국정부는 이렇다 할 광업법 하나 마련치 못하고 無定見한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황실은 황실대로 외국인에게 특허를 내주고 황실수입을 증액시키는 데만 급급하였을 뿐, 정작 국가적인 안목에서 광업정책을 수립하는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00년 이후 일본이 점차 한국에서 세력권을 장악하면서 광산업무는 거의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련된 것이 1906년의 광업법이다. 그러니까 1906년 6월에 발표된<광업법>은 한국정부가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광산을 탈취하려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일본인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다.234)李培鎔, 앞의 책, 229∼237쪽.

 처음부터 열강들은 한국광산 이권을 획득하여 채굴하면서 한국에 아직 내세울 만한 광업법이 없음을 간파하고, 기왕이면 그들에게 유리한 법령을 작성하여 한국정부에 제시하고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예가 1904년 영·이·벨이 공동으로 마련한 광업법 초안이다. 이것은 한국에 적용하려는 최초의 광업법 초안이었다. 영국이 청국에 제시하였던<광업법>을 기초로 하여 당시 한국정부에 광산특허권을 교섭중이던 이태리 및 벨기에와 협의하여, 초안을 만들어 일본정부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영국인 커리(Currie), 이태리인 모나코(A. Monaco), 벨기에인 빈카르(Vincart)가 합의하여 만든<광업법>초안은 전문 16조로 되어 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한국광산을 각국 자본에 개방하자는 것.

② 광산사업에 필요한 조영물·도로·토지·건물 등에 대한 각종 조세를 면제하자는 것.

③ 광산경영에 필요한 재료는 해관세를 면제하자는 규정.

④ 본 규칙 발표 후 2개년간은 한국인이나 조약을 맺은 각국인이 동등하게 1個所 이상의 광산특허를 얻을 권리를 줄 것.

⑤ 시굴허가는 전국을 통해 효력을 갖게 할 것과 시굴한 후 채굴지를 出願하면 20일 이내에 허가해 줄 것.

⑥ 시굴기간은 3년으로 정하고 또한 2년을 더 연장해 줄 것과 채굴특허기간은 30년으로 정할 것.

⑦ 鑛區는 금·은·동의 경우 30리, 鑛稅는 금·은·동의 경우는 매년 순이익의 5%로 정함(≪日本外交文書≫37-1, 문서번호 623).

 영국이<광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은산금광 외에 수안금광의 특허를 얻으려고 이 시기에 교섭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태리·벨기에도 광산을 요구하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의 목적이 일치되어 그들에게 유리한<광업법>을 만들어 한국정부에 권유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일본정부도 대한정책 중 일본의 이권을 위해 한국광업법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광산기술자들로 하여금 한국광산을 세밀히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영·이·벨기에가 제시한<광업법>초안에 대해 일본은 몇 가지 대책을 세우고 한국에 주재하는 자국의 외교관들에게 시달하였다.235)≪日本外交文書≫37-1, 문서번호 624. 즉 영·이·벨기에 등의 계획에 동조하든지 저지하든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충분히 검토한 후에 확답할 것과, 그에 수반해서 정밀한 조사를 한 후에 그 중에서 유망한 광산 몇 개소는 미리 일본의 수중에 넣고 그 외의 광산에 대해서만 외국인에게 許與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영·이·벨기에의 광업법 초안을 토대로 결점을 보충하는 등의 수정을 거친 다음 광업법안을 마련하여 적당한 시기를 보아 공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236)≪日本外交文書≫37-1, 문서번호 625.

 영·이·벨기에의<광업법>초안에 대한 일본측 입장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시굴문제에 대한 의견으로 원칙적으로 시굴과 채굴의 구별을 철폐할 것을 기본으로 정하였다. 이와 함께 20일 이내에 시굴에 대한 허가를 주어야 한다는 조항은 나라의 주권을 간섭하는 처사이므로 부당하며, 또한 광업출원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조사를 거쳐야 되기 때문에 원서처리 기간은 8개월로 할 것과 시굴기간도 2년으로 제한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둘째 조차기간은 30년으로 정하고, 셋째 광구는 석탄광만 1만 평 이상으로 하고 다른 광물은 5천 평 이상 모두 60만 평을 초과하지 말 것과, 넷째 광업세는 내외국인의 차등을 두지 말고 일률적으로 생산고의 1/100세로 할 것과, 다섯째 광업출원 때 반드시 출원자의 주소·국적, 요망하는 鑛區·鑛物·鑛區圖를 첨부할 것을 명시하였다.237)≪日本外交文書≫37-1, 문서번호 626.
≪統監府來文≫(奎 17849-2), 1905년 4월.

 <광업법>은 주로 1904년 말부터 일본 농상무성에서 기초하였는데 이 때 만들어진 초안을 가지고 巨智部忠承이 1905년 6월 한국 농상공부 고문으로 내정되어 내한하였다. 거지부충승이 부임하자 본격적인 법안심의에 착수하였다. 법안심의는 통감부의 參與官이며 농상공부차관인 키우치 쥬시로(木內重四郞)과 쿠로이와 야스타로(黑岩休太郞) 技師,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도지부고문, 농상공부 광산사무국 고문인 거지부충승 등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한국정부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4월에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 안건으로 광업법안을 제시하면서 한국 내각대신들의 의견을 형식적으로나마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參政大臣 박제순을 비롯한 한국대신들은 일본이 작성한 광업법안 중에서<광업법 및 시행세칙>의 규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조항과 내외국인에게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한국측이 제시한 수정안은 첫째 외국인의 경우에만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둘째 광산에 관한 권리는 한국인 우선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토대로 하여 그 절차에 있어서는 한국인이 먼저 권리를 획득한 후 다시 일본인에게 양도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시 외국인에게 이전하는 형식으로 채굴권을 허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토통감은 한국대신들이 법률적 소양없이 명분론에만 집착하여 오히려 광산행정에 혼잡만 초래할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묵살하였다.238)≪日韓外交資料集成≫6-上(일한병합 편),<韓國施政改善ニ關スル協議會>제5회, 211∼213쪽;제6회, 222∼230쪽.
≪制度局鑛業書類≫(奎 21935), 1906년 6월 29일.

 결국<광업법>은 1906년 6월 29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되었다. 전문 32조로 되어 있으며 동년 9월 15일부터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239)≪韓末近代法令資料集≫Ⅳ, 590∼595쪽. 형식상으로는 한국의정부와 농상공부 명의로 발표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통감부에서 관장하였다.

 <광업법>의 주요내용은 ①광구의 경계는 직선으로 정하고 지표경계선의 直下를 限하며 그 면적은 석탄에 있어서는 5만 평 이상 기타 광물에 있어서는 5천 평으로 하되 모두 100만 평을 초과하지 못함(제 4조). ②皇城 및 離宮의 주위 300間 이내와 火巢以內의 처소는 광구로 하지 못하며 관할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광업을 위해 사용할 수 없음(제 5조). ③광업을 청원하는 자가 同一地에 2인 이상이 있을 때는 청원서 도달일의 先者에게 허가함. 동일에 도달하는 자에 대해서는 농상공부대신이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자에게 허가함(제 8조). ④광업권은 농상공부대신의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양여 또한 저당할 수 없으나 다만 광업권은 상속할 수 있음(제 10조, 이 조항은 1908년 7월 2일 법률 제 11조로 개정되었는데 광업권은 상속, “양도하고 또는 저당할 수 있음”으로 고쳐졌다). ⑤광업청원 또는 광업을 위하여 타인의 토지에 犯入하여 측량 또는 조사함을 필요로 하는 자는 농상공부대신에게 그 인가를 청구할 수 있고, 인가서를 휴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토지소유자 또는 연계인은 이를 거절하지 못함. 단 측량과 조사를 위해 손해가 발생할 때는 청구자는 그 배상을 행할 것(제 14조). ⑥광산권자는 광산세 및 광구세를 捧納할 것. 즉 광산세는 광산물가격의 1/100로, 광구세는 광구 매 1천 평에 1개년 50전으로 함. 단 1천 평 미만자는 1천 평으로 하여 허가 후 만 1개년간의 광구세는 前項全額의 半額으로 함(제 19조). ⑦궁내부소속 광산은 칙령으로 고시하며 궁내부소속 광산을 채굴하고자 하는 자에 대해서는 본법규정을 적용치 아니함(제 25조, 이 항목은 1907년 8월 8일 칙령 제 3호로 일부<25개 광구>궁내부소속 광산이 폐지되었다). ⑧본 법 및 시행세칙의 규정에 있는 처분은 외국인에 관계함이 많은 고로 일본국 통감의 동의를 거쳐야 함. 또한 궁내부소속 광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임(제 27조, 이 조항은 1908년 3월 16일 법률 제 4호로 개정되었는데 “외국인에 관계함이 많은 고로”를 삭제하고 대신 각 조항의 농상공부대신의 처분은 일본국 통감의 처분으로 바뀌어졌다) 등이었다. 이 외에도 광업허가를 취소하는 경우를 한정하였고 광업권자와 토지소유자의 관계를 규정하여 토지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일본인 통감 이토가 한국으로 하여금<광업법>을 공포케 한 의도는, 첫째 기존 궁내부소속 광산제도를 폐지하여 자유롭게 한국광산을 차지할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궁내부소속 51개 광산 중 26개 광구만을 황실직영으로 남겨 두게 되었고, 그나마 통감부의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또한 광업권이 양도·저당의 목적물로 사용되어 광업권을 획득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특히 자금융통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둘째는 국내외인의 구별을 철거함으로써 일본인과 구미인이 한국광업 채굴에 진출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즉 구미자본과 일본의 제휴방침을 재확인한 것이며 내·외국인에게 균등한 광업권 향유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었다. 이후로 일본인들은 광업허가건수 중 거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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