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1.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 5) 이권 탈취
  • (4) 어업권

(4) 어업권

 조선의 어업 이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침략을 해 온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먼저 러시아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동해를 중심으로 한 捕鯨權이었다.253)윤병석, 앞의 글.
박구병,<한말 동해 포경업을 둘러싼 러·일의 각축>(≪아세아연구≫8-2, 고려대, 1970) 참조.
러시아는 동해에 고래가 많다는 정보를 갖고 1896년 케이제를링 백작이 동해에 捕鯨場을 설립하여 같은 해 1월 14일부터 5월 하순까지 54마리의 고래를 잡았다. 이후 러시아는 점차 포경권을 확장하였는데 조선 근해에서의 포경권의 독점을 목적으로 한국정부와 교섭을 벌여 나아갔다. 그 결과 케이제를링은 동해안의 蔚山·城津·眞寶 등을 어장으로 조차하였는데, 계약조건은 일방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것이었다.254)그 중요한 계약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울산·성진·진보 등지에서 각각 24,500평방 사제니(러시아의 길이의 단위, 1사제니는 약 2,134m)의 지면을 24년간 租借하여 어장을 확립한다.
② 각 어장은 조선 세관의 감독을 받는다.
③ 조차지에 대해서는 매년 153달러를 조차비로 조선정부에 납입한다.
④ 잡은 고래에 대한 한 마리당 20달러씩을 조선정부에 납부하고 어장에 전속하는 감독관 3인에 대해 100달러씩을 지급한다.
⑤ 만약 계약기간 중에 이들 어장을 自由港으로 할 경우에는 조선정부가 6개월 전에 케이제를링에게 통고한다.
러시아 대장성 편,≪국역 韓國誌≫(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457쪽.
윤병석, 앞의 글, 119쪽에서 재인용.
포경권을 획득한 러시아는 일본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상당한 수확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 어획고에 대한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일본 長崎에 근거를 두고 있던 러시아인 경영의 太平洋捕鯨會社가 동해안에서 매년 15만 원 내지 25만 원의 어획고를 올렸다는 점을 참조하면 케이제를링의 수익도 그에 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본은 1883년 7월<朝·日通商章程>이 체결된 이후 경상·전라·강원·함경 등 4도의 연해가 개방됨에 따라 어로작업을 하면서 조선의 어민들을 괴롭혀왔다.255)박구병,<한·일 어업문제 연구-1876∼1910>(≪부산수산대학연구보고≫제7권 제1호, 부산수산대, 1967), 6쪽. 이후 1896년에 이르러서는 부산·원산·목포·군산·마산 등지에서 어업협회를 조직하는 한편 단결된 힘으로 조선 어업의 발전을 저해하면서 매년 500만 원을 넘는 어획고를 올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며,256)박구병, 위의 글, 47∼53쪽 참조.
일본인들의 違約行爲 및 범법행위의 대표적인 예를 보면 密航密漁·潛商·上陸結幕(불법적으로 연안 각지에 상륙하여 家屋을 짓고 거류하면서 이를 근거지로 삼아 漁撈와 어획물의 제조 가공을 하는 행위)·폭력행위 및 盜掠행위 등이 있다.
낙동강 하류에서는 내륙어업에까지 손을 뻗쳤다가 금지를 당하기도 하였다.257)윤병석, 앞의 글, 131쪽.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은 1900년 11월에는 경기도 연해의 어업권을 추가로 얻어내고, 그 뒤에는 허가도 받지 않고 南浦 부근까지 출몰하여 조선의 어업권을 침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이러한 범법 행위를 발판으로 마지막 남은 충청·황해·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258)박구병, 앞의 글, 43∼45쪽.

 일본은 연안어업권 외에도 포경권의 획득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포경업자들은 포경 특허를 받기 전부터 이미 동해에 출몰하여 불법적인 포경행위를 하고 있었다. 1900년을 전후하면서 일본에도 노르웨이식 砲殺捕鯨法이 도입되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日本遠洋漁業株式會社를 앞세워 본격적인 진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회사의 대표였던 가와키타 간시치(河北勘七)는 그 전해에 조선이 러시아에게 포경권을 준 사실을 들고 나와 기회균등을 주장하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포경특허교섭을 벌였다. 그 결과 1900년 2월 한국정부로부터 영해내 포경의 특허를 받는데 성공하였다.259)박구병, 위의 글. 22∼24쪽. 이 특허에 의하면 일본원양어업주식회사는 당시 일본의 통허구역이었던 전라·경상·함경·강원 4도 가운데 전라도를 제외한 3도의 연안 3해리 내에서 1900년 2월부터 3개년간 기계선 1척 당 매년 800원의 세금을 납부하고 포경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다시 1903년에 捕鯨基地를 청구하여 이해 12월 강원도 長箭浦와 함경남도 北靑의 珍浦島 및 경상남도 蔚山浦의 세 항구를 획득하였으며, 1905년에는 러시아인이 경영하던 포경기지도 차지하여 포경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일본의 이권침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한 도처에서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이권침탈은 다른 열강의 방법과 달랐다. 다른 열강의 경우 자본가들이 전적으로 나서서 이권을 획득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지배확립을 기본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므로 私的인 자본가가 표면에 나타날 때에도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얻거나, 때로는 정부의 앞잡이 구실을 하여 획득하였던 것이다.

<李培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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