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1. 무역구조의 변동과 시장권의 재편성
  • 1) 무역구조의 변동
  • (2) 무역구조의 변동을 초래한 요인으로서 청일·러일전쟁과 일본의 산업혁명

(2) 무역구조의 변동을 초래한 요인으로서 청일·러일전쟁과 일본의 산업혁명

 <표 1>에서 보면, 무역액은 다소 기복이 있지만 급증하는 추세였다. 1894∼1910년 동안 수출액과 수입액이 모두 7배정도 증가하였다. 그런데 수출입액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직전에 정체된 상태에 있다가 전쟁을 획기로 하여 약간의 시차를 두면서 보다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였다. 두 전쟁이 조일무역의 확대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전쟁은 무역시장에서 일본의 지위를 한층 강화하였다.<표 2>에 의하면, 청일전쟁 직전에 맹렬한 기세로 성장하여 총수입액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청국의 비중이 청일전쟁 이후에는 30%대로 하락하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10%대로 하락하였으며, 그 반면 일본수입품의 비중이 신장하였다. 수입무역에서 일본의 지위 상승은 금수출에서 일본의 비중을 높였다.<표 2>에 의하면, 청일전쟁 직전 금수출에서 일본의 비중은 4할대이던 것이 그 직후에 7할 내외로 급등하였다.

 일본제 면제품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시장을 급속히 개척하였다. 전쟁 중에 군수품의 조달과 노동력의 징발에 수반하여 다액의 일본화폐가 산포되었고, 그로 인하여 조선인의 金巾 등의 구매가 촉진되었다. 일본정부는 전쟁 중에 금건의 직수입, 유력 자본의 진출, 내지행상의 장려, 일본제 면제품의 판매 확대 등의 무역확대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전쟁 후에 금건의 직수입, 면제품 수출의 비약, 내지행상의 진전과 內地雜居, 일본상인의 자본축적, 甲午改革에 의한 판로 확대가 이루어져 무역이 확대되었던 것이다.321)朴宗根,<日淸戰爭と朝鮮貿易>(≪歷史學硏究≫536, 1984). 청일전쟁은 무역담당자인 양국 상인의 세력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일본의 무역우위를 가져오는 데에 기여하였다. 청국의 패배로 청국상인은 일시적으로 철수하여야 했고, 다시 복귀하였지만 상업활동을 뒷받침할 정치적 후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청일전쟁이 일본의 조선시장 개척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당시 수입주종품이던 洋金巾의 수입권은 청국상인이 철수하자 일본상인이 장악하였지만, 얼마 후에 복귀한 청국상인이 탈환하였던 것이다. 러일전쟁을 통하여 일본의 정치적 지배가 확고해진 후부터 비로소 일본상인이 중계무역에서도 청국상인을 압도할 수 있었다.322)朝鮮貿易協會,≪朝鮮貿易史≫(1943), 45∼46쪽.

 수입품 중 일본제품의 비중이 증가하고 무역시장에서 일본이 중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요인은 일본의 산업혁명의 수행에 따른 청일간 생산력 격차의 확대였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을 갈라놓고 일본의 산업혁명의 추진을 뒷받침하였다. 조선은 밑으로부터 변혁을 지향한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세력에 패배당하였고, 청국의 洋務運動은 파산을 선고당하였다.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을 공업화에 활용할 수 있었고,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제국주의로 본격적으로 전환하여갔다.

 산업혁명이란 기계의 발명과 이용을 기초로 하여 자본제 생산양식이 전사회적으로 확립되는 과정이었다. 後發資本主義國은 선진자본주의의 외압을 막고 경제적 격차를 축소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국가 주도의 殖産興業政策을 추진하였는데, 명치유신이래 일본정부도 관영공장의 설립·운영, 민간자본에 대한 보조금과 저리 융자, 주식회사와 은행의 설립 장려 등의 식산흥업정책을 강력히 수행하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二千錘紡績이 극히 부진한 때에,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의 지도하에 1만추 규모의 大阪紡績이 1882년 설립되고 다음해에 개업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 이에 촉발되어 대도시의 면업 관계 상인이 연이어 대판방적을 모델로 하여 대규모 기계제 방적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886∼9년경 면방적업·철도업·광산업을 중심으로 기업이 발흥하였다. 이 기업발흥기는 산업혁명의 개시기로 파악된다. 러일전쟁을 획기로 力織機가 급속히 보급되어 역직기를 중심으로 하는 공장의 생산액이 직물생산액의 과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러일전쟁 직후에는 생산수단의 국산화의 방향이 확정되었다. 그런 점에서 러일전쟁 직후에 산업혁명이 종료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의 공업화에 수반하여 무역구조가 변하였다. 초기의 무역구조는 미국 및 프랑스에 生絲·茶를 수출하여 인도를 포함한 대영제국으로부터 綿絲·綿布를 수입하는 후진국형이었다. 그런데 면방적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계제공업의 발전을 통하여 수입 면제품을 구축하는 동시에, 나아가 청일전쟁 후에는 청국이나 조선으로 면제품의 수출이 진전되고 러일전쟁 후에는 면제품의 대영제국으로의 수출도 신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무역구조가 후진국 유형으로부터 탈피하여 선진국적 측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

 면업에서는 방적자본이 확립됨과 동시에 만성적인 생산과잉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紡績連合會는 조업 단축을 시행하는 동시에 수출장려금의 교부에 의한 덤핑수출을 행하였다. 대규모 방적업의 발전에 수반하여 면사 생산이 급증하여 1890년에는 벌써 수입량을 초과하고 1897년에는 수출량이 수입을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직포업을 兼營하는 방적회사가 증가하였는데, 여기서 생산된 면포가 다량 수출되었다.323)일본의 산업혁명과 무역구조의 변화에 관해서는 石井寬治,≪日本經濟史≫2版(東京大學出版會, 1991), 3장 4절과 4장 1절을 참조.

 일본에서 자본주의의 형성과 확립은 제국주의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일본에 있어서 조선무역은 비중이 작지만 신장률이 최고이고 그 대폭의 흑자는 적자의 보전에 기여하였다. 일본 면업의 발전과 방적자본의 확립은 해외시장의 개척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일본 면업의 2대시장은 청국과 조선인데, 청국으로는 면사 수출이, 조선으로는 면포 수출이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시장은 청국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일본제품의 비중이 컸다는 점에서 일본면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특히 生金巾과 白木綿의 수출은 조선시장에 결정적으로 의존하였다. 생금건은 직포업을 겸영하는 방적자본의 기계제 대공장에 의하여 생산된 반면, 백목면은 선대제 가내수공업 내지 매뉴팩쳐의 제품이었다. 생금건 중에도 섬세한 고급의 제품은 영국제와 경쟁할 수 없었고, 토착 면포의 성질이 유사한 두터운 실로 짠 하급의 시팅이 주로 수출되었다. 일본의 선대제 가내면업 내지 면업 매뉴팩쳐는 바탄機의 도입 등 노동수단의 高次化를 달성함으로써 조선면업에 비하여 2∼3배 높은 노동생산성을 확보하고 조선에서 백목면의 시장을 순조롭게 개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재래면업이 力織機를 가지는 근대 기계공업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조선시장이 기여하였다.324)村上勝彦,<日本資本主義による朝鮮綿業の再編成>(≪日本帝國主義と東アジア≫, アジア經濟硏究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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