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1) 양반 신분제도의 변화
  • (3) 광무호적과 양반신분의 존재

(3) 광무호적과 양반신분의 존재

 위와 같이 양반신분과 관련하여 관료집단 및 신분직업상의 변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어 갔으나, 이러한 변화에 의해 양반신분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양반신분의 존재는 갑오개혁 이후 작성된 호적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614)광무호적을 분석한 연구로는 金泳謨,≪韓國社會階層硏究≫(一潮閣, 1982) 및 조성윤, 앞의 책 참조. 1896년 9월 정부는 전국적 규모의 새로운 호구조사를 위해 칙령 제61호로<호구조사규칙>을 마련하고 이어 內部令 제8호<호구조사세칙>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였다. 신호적은 그 기재 양식에서 직역 대신 직업을 적도록 되어 있는 것이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신분제 폐지의 한 결과인 동시에 호적 작성에서 군역 부과의 목적이 경제활동 내용의 파악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에 따라 군역 謀避로 인한 호적상의 왜곡은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 기재를 통해 호주의 신분, 특히 그 양반신분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아직 근대적인 직업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직’은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그리고 ‘업’은 구체적인 생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예컨대, 職士業農). 대부분의 양반은 ‘업’보다 ‘직’을 중시하여 실제로는 무직유업이라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 곧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幼學이나 前職 등만 직업란에 기재하였던 것이다.615)조성윤, 위의 책, 112쪽 참조.

 광무 7년(1903)과 광무 10년에 작성된 漢城府戶籍을 분석해보면, 양반신분으로 간주될 수 있는 범주는 다음<표 2>와 같이 전체의 34.9%로 나타난다.616)조성윤, 위의 책, 129쪽의 표를 재구성한 것임. 조사 지역은 안국방·정선방·훈도방·반송방·연희방·연은방.

       신분
호수 및 비율
양 반 중 인 상 민 근대직업 무기재 합 계
戶 數 903 1 1,390 98 194 1,586
비 율(%) 34.9 0.0 53.8 3.8 7.5 100.0

<표 2>광무년간 한성부 호적과 신분구조

 이 구성비는 서울 북부에서 조사된 양반호수를 토대로 전국의 양반을 전체 인민의 3분의 1로 추정한 1905년≪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거의 합치한다.617)≪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11일. 광무호적에서 양반신분으로 분류된 것에는 과거의 관직·품계 또는 유학 등의 직역을 기재한 경우와 갑오개혁 이후의 신관직명을 기재한 경우가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중인이나 평민 출신으로 관료로 진출한 자도 일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관제에 따른 관직을 기재한 경우는 전체 양반의 22.2%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관직 보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으로 양반신분에 해당하는 직역명인 幼學 등의 기재만으로 분류된 경우는 전체 양반의 36.8%에 달하고 있어서 여전히 상당한 구성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618)이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조성윤, 앞의 책, 131∼134쪽 참조.

 그런데 서울과 달리, 동일한 시기의 지방 호적에 나타나는 양반신분의 존재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표 3>은 현재 남아있는 1903∼1905년의 호적 중 농촌지역에 해당하는 몇 개 지역을 추출하여 그 신분구조를 보인 것이다.619)金泳謨, 앞의 책(1982), 191쪽의 표를 재구성한 것임.

지 역 \ 신 분 官僚 幼學 農民 商人 工人 平民 其他 不記 合計
京畿 龍仁郡 枝內面 0.6 59.3 26.7 - - 11.6 - 1.7 99.9
慕賢面 6.5 36.3 54.9 0.8 - 0.3 - 1.1 99.9
忠南 燕岐郡 東一面 - 2.2 97.1 - - - - 0.6 99.9
全北 鎭安郡 南 面 - - 98.2 0.3 - - 1.5 - 100.0
斗尾面 - - 100.0 - - - - - 100.0
平南 德川郡 金城面 - - 99.5 - - - - 0.4 99.9
慶南 彦陽郡 上北面 0.4 - 35.7 11.6 0.8 - 15.6 35.7 99.8

<표 3>광무년간 농촌지역 호적과 신분(직업)구조 (단위 %)

*1. 幼學은 士人·出身·童蒙 등도 포함된 것임.
 2. 德川郡 호적에는 幼學이 農業과 같이 기재되어 있음.
 3. 鎭安郡은 1903년, 龍仁郡은 1905년, 그 외 지역은 1904년의 호적임.

 위 표에 의하면 경기도 용인군의 2개 면 지역에서만 여전히 양반신분의 구성비가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3%에 미치지 못하거나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평안도 덕천군의 사례인데 이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호적의 직업란에 농업과 幼學을 동시에 기재하고 있다. 이 특이 사례를 두고, 이 시기 농촌 지역에서 전통적 신분개념이 해체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620)金泳謨, 위의 책(1982), 191쪽. 일반적으로는 농촌 지역에서의 해체가 더욱 지연되었을 것으로 본다면 오히려 19세기의 호적에 나타나는 거대한 양반인구수가 실은 모칭 등에 기인한 허수였음을 입증하는 반증례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로 삼은 광무호적에 나타나는 양반신분의 구성적 비중은 조선후기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20세기 벽두에 이르러서도 아직 양반이 전면 해체되지 않고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경술국치 직전인 융희 4년(1910) 5월의 民籍統計表에서 좀더 명확히 드러난다. 당시 內部 경찰국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호주의 직업을 조사한 바 있는데, 그 구성비만 나타내면 다음<표 4>와 같다.621)金泳謨, 위의 책(1977), 50쪽의 표에서 전국 통계만 취한 것임.

호주직업 관공리 양반 유생 상업 농업 어업 공업 광업 노동자 기타 무직
구 성 비 0.5 1.9 0.7 6.2 84.1 1.2 0.8 0.05 2.4 1.2 1.1

<표 4>1910년 전국 戶主의 직업별 구성비 (단위:%)

 위 표에 의하면 당시 양반은 전체 호수의 1.9%(54,217호), 유생은 0.7%(19,075호), 관공리는 0.5%(15,758호)로 나타나고 있다. 양반과 유생이 당국에 의해 ‘직업’ 범주로 설정되어 있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는 곧 이들이 그 사회적 지위만으로 여타의 직업과 구별될 수 있었던 것, 즉 전통적 양반신분에 준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622)실제 이들의 직업은 대개「地主」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독부 간행≪농업통계표≫에 의하면, 1913년의 경우 지주는 전체 농가의 3.1%, 8만 1천여 호 정도였다(백욱인,<식민지 시대 계급 구조에 관한 연구>,≪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8, 140쪽). 구성과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이 수치는 위 양반·유생을 합친 것과 근사하다. 따라서 구성이 복잡하였을 관공리를 제외하더라도, 최소 2.6%(73,292호)에 달하는 양반·유생이 전통적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해 3월 경찰국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양반·유생은 종래 양반신분과 동일하게 “거만존대하고 사회의 상위에서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여 폭력을 휘두르며, 서민을 학대하여 노예와 같이 심한 일을 시키고 재화를 탈취할 뿐 아니라, 私邸에 사람을 구금하여 재판·형벌·징세 등과 같은 행위를 僭行”하고 있었던 것이다.623)金泳謨, 앞의 책(1982), 14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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