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2) 중간신분층의 부상
  • (1) 갑오개혁과 중간신분층의 지위 변화

(1) 갑오개혁과 중간신분층의 지위 변화

 갑오개혁에 의한 개혁 조치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개혁의 하나가 바로 신분제에 대한 개혁이었다. 그것은 신분제야말로 관료제 및 지주전호제와 더불어 바로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갑오개혁 당시의 입법기관 역할을 했던 군국기무처의 ‘議定案’ 중에서 가장 먼저 의결된 것이 바로 신분제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636)군국기무처에서 가장 먼저 의결한 의정안은 대외관계와 관련된 다음 두 조항이다.
① 지금부터 국내외 公私文牒에는 開國紀年을 쓸 것.
② 청국과 약조를 개정하고, 列國에 특명전권대사를 다시 파송할 것.
따라서 내정의 개혁과 관련된 의정안은 세 번째 의정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위 번호(①·②)는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안건의 순서를 가리킨다(이하 같음). 의정안 자료(및 그 순번)에 대해서는 유영익,≪갑오경장연구≫(일조각, 1990)의 부록,<資料 3>을 참조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1894년 6월 25일(음력, 이하 모두 같음) 신설된 군국기무처에서는 신설된 직후인 6월 28일 첫 번째 작업으로 다음과 같은 의정안을 의결하여 법령으로 사회신분제를 폐지하였다.

③ 門閥과 班常의 등급을 劈破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쓸 것. ④ 文·武 尊卑의 차별을 없애고, 단지 품계에 따라서만 相見儀가 있게 할 것. ⑤ 罪人 자기 이외에는 緣坐律을 일체 시행치 않을 것. ⑥ 嫡·妾이 모두 아들이 없는 연후에야 비로소 양자 들이는 것을 허용하여, 舊典(≪경국대전≫)을 밝게 펼 것. ⑧ 寡女의 再嫁는 貴·賤을 毋論하고 그 자유에 맡길 것. ⑨ 公·私 奴婢의 제도는 일체 혁파하고, 人口의 판매를 금할 것. ⑩ 비록 평민일지라도 참으로 利國便民할 起見을 가진 자는 군국기무처에 上書하여 회의에 부치게 할 것.

 물론 이상의 법령 의결로 사회신분제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위 조항들 중에는 다분히 선언적인 것에 불과한 것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후속조치로 인해 원래의 개혁안은 상당히 후퇴하였기 때문이다.637)신용하,<1894년의 사회신분제의 폐지>(≪규장각≫9, 1985).
유영익,<갑오경장과 사회제도 개혁>(주보돈 등 공저,≪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1992).
조성윤,<갑오개혁기 개화파정권의 신분제 폐지 정책>(≪김용섭교수 정년기념논총≫, 지식산업사, 1997).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기본 골격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부정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중간신분층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신분적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이미 이루어진 법적 조치를 확인하는 조항들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신분적 위상의 변화를 뚜렷이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개혁에 대해 그것은 신분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관리임용에 있어서의 신분적 제한의 철폐 또는 완화에 불과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638)유영익, 위의 글 등 참조. 특히 후속조치에 의한 개혁안의 후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견해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양반의 특권에 대한 철폐 즉, 양반제의 폐지라는 의미를 가짐은 분명하다. 이것은 관료체계의 일원화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확인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갑오개혁의 신분제 개혁은 중간신분층에 가장 유리한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동안 경제적·학문적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법적·관습적 제약으로 관료로의 진출 특히 고위직 또는 淸要職에의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간신분층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639)상민들은 중간신분층에 비해 경제력 및 교육 등의 면에서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일반적 사정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의 하나로 갑오개혁 주도층의 신분적 성격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유영익에 의하면, 갑오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협판급 이상의 소장관료 중에는 다음과 같은 ‘亞流兩班’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640)유영익, 앞의 책 및 앞의 글 참조.

武官 : 趙羲淵·權瀅鎭·禹範善·李周會 庶孼 : 金嘉鎭·安駉壽·權在衡·李允用·尹致昊 中人 : 鄭秉夏·高永喜·吳世昌 土班 : 金鶴羽·張博

 그런데 이른바 아류양반이란 무관을 제외하면, 바로 중간신분층에 속하는 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양반의 배타적인 특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641)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의 신분제 개혁 의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갑오개혁의 신분제 개혁을 추진 주체의 신분적 성격에서만 찾는 견해는 미시적인 것이다.642)물론 유영익 교수도 이런 미시적인 관점에서만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 조치는 오랜 기간에 걸친 농민운동의 흐름과 실학파 및 개화파의 개혁논자들에 의한 신분제 폐지 운동의 흐름이 1894년의 시점에서 합류하여 이룩한 성과이기 때문이다.643)신용하,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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