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4) 가족관계의 변화
  • (1) 갑오개혁이전의 가족관계 변화

가. 갑신정변기의 가족관계

 696)본 항목에서의 ‘가족관계’는 사회학적 가족 상호간의 관계에 국한시킨 것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가족에 관계’된 제 조건의 변모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가족관계를 규정하는 호적제도에 관한 중요 연구업적은 다음을 들 수 있다.
최홍기,≪한국호적제도사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75).
허흥식,<고려 및 이조의 호적>(≪한국중세사회사자료집≫, 아세아문화사, 1976).
김영하·허흥식,<한국중세의 호적에 미친 당송호적제도의 영향>(≪한국사연구≫19, 1978).
최승희,<호구단자.준호구에 대하여>(≪규장각≫ 7, 1983).
武田幸男,<학습원대학장 조선호적대장의 기초적 연구>(1983).
역사학회,≪한국친족제도 연구≫(一潮閣, 1992).
李丙洙,<우리나라 근대화와 刑法大全의 頒示-家族法을 中心으로하여->(≪法史學硏究≫2, 1975).
근대적인 개혁운동의 효시인 甲申政變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金玉均이 1885년에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甲申日錄≫에서 언급한 이른바 政綱14條에서는 가족에 대한 구체적 개혁안은 없다. 그러나 제2항에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가족이 속한 문벌의 신분제적 기반을 해소시켜 개인을 능력 위주로 파악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항목 때문에 갑신정변의 근대민주주의지향의 성격이 보다 선명히 부각되었다고 평가된다.697)李光麟,≪開化黨硏究≫(一潮閣, 1973). 즉 문벌의 폐지와 능력위주의 인재 등용은 인민평등권의 보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3년 후인 1888년 1월 13일 갑신정변의 지도자중 일인인 朴泳孝가 망명지인 일본에서 집필한 上訴文에서는 보다 괄목할만한 구체적인 가족관계상의 변화가 나타난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색으로 하여금 구래의 혐오스러운 풍습인 相婚姻을 폐지할 것.

둘째,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것을 금하고 古俗에 따라 혼인연령을 제한할 것.

셋째, 지아비가 자신의 아내에게 강포히 하는 것을 금할 것.

넷째, 令을 내려 남자가 취첩하는 것을 금하고, 과부가 개가하는 일을 임의대로 할 것을 허락할 것.

다섯째, 자손을 양육함에 있어 강포히 하는 것을 금할 것.

여섯째, 남녀 부부는 권리가 균등하다.

 (≪日本外交文書≫21, 문서번호 106, 292∼311쪽).

 특히 남자는 아내가 있는데도 첩을 얻어 아내에게 소홀히 할 수 있는데, 여자는 개가할 수 없거나 이혼할 수 없으며, 여자의 간음은 금하면서 남자의 품행이 어지러운 것은 금하지 않는 것은 어떤 연고인가. 혹은 남자는 아내를 잃으면 재취할 수 있는데 여자는 남편을 잃거나 아직 합궁하지도 않았는데 재가할 수 없음 등을 지적하면서 부부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여성의 이혼·재혼권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즉 박영효의 개화상소는 전반적인 국정개혁요구이므로 김옥균의≪갑신일록≫과 상보하여 이해되어져야 하겠지만 가족관계의 측면에서만 볼 때, 첫째 봉건적 신분계급제도의 철폐, 둘째 남녀·부부의 평등권, 셋째 자녀의 인권 실현을 기도하였다고 파악되며, 이것은 유교적 가족윤리의 기본틀이 되는 三綱의 배격을 의미하는 가족법사상 봉건부정사상이 관철되었다고 평가된다.698)李丙洙,<우리나라 近代化와 刑法大全의 頒示>(≪法史學硏究≫2), 253쪽.

 다음 이 시기의 가족관계 변화에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써 兪吉濬699)柳永益,<甲午更張 이전의 兪吉濬>(≪甲午更張硏究≫, 一潮閣, 1990).을 들 수 있다. 그가 1889년 가을에 집필한≪西遊見聞≫은 전체 20편으로 구성되었다. 그 가운데 가족관계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제3편<국민의 교육>에서 외국의 교육제도를 소개하고 도덕교육, 재예교육, 그리고 공업교육을 교육의 三大綱이라며 강조하였는데, 이는 正德·利用·厚生의 전통적인 개념과 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700)≪西遊見聞≫, 제3편. 특히 자녀교육의 중요성이나 교육제도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나 여성교육기구와 교육제도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제4편<국민의 권리>에서 인간의 身命·재산·영업·집회·종교·언론·명예에 대한 자유와 그에 대해 정의하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701)≪西遊見聞≫, 제4편.

 제12편<어린이를 양육하는 법>에서는 어린이 교육 특히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즉 “어린이는 나라의 근본이고, 여자는 어린이의 근본이며, 지금의 어머니는 옛날의 童女이다. 그러므로 동녀가 실상은 나라의 근본을 만든 근본이니, 그가 만약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근본이 되기는 고사하고 그 근본을 병들게 하거나 해칠 뿐이다. …여자를 교육하는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다”702)≪西遊見聞≫, 제12편.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계몽주의 내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영향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703)女性學敎材編纂委員會 編,<近代化와 女性>(≪女性學≫, 韓瑞出版, 1985), 91∼120쪽.
장미경 편저,≪오늘의 페미니즘-세계 여성운동≫(문원, 1996), 18∼20쪽.

 그밖에 제15편<결혼하는 절차>·<여자를 대접하는 예절>에서는 서구식의 사교와 에티켓 및 일부일처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서 “몇년전에 미국대통령을 새로 선거할 때 국내의 여자들이 생각하기를, ‘어찌 남자만 대통령 자리에 있고 여자는 될 수 없는가’라고 하면서 많은 여자들이 대회를 열어 법관 鹿久尤의 부인을 지명하여…”704)≪西遊見聞≫, 제15편.하면서 미국 여성의 참정권운동과 전문직에의 여성 진출을 소개하기도 하였다.705)우에노 치즈코 著, 이승희 역,<부르조아 여성해방사상의 함정>(≪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녹두, 1994), 21∼25쪽.

 물론 갑신정변은 실패한 개혁운동이었지만 이상의 개화사상가들의 구미 및 일본 여성에 관한 소개는 여성의 새로운 역할 및 가정과 사회에서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의 전개는 동학이라는 토대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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