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2. 신분제도의 변화
  • 5) 여성의 사회진출
  • (3) 의료계와 종교계로의 진출

가. 의료계로의 진출

 개화기 한국여성에게 있어 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근대 의료의 혜택이었다. 이를 간파한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1886년에 최초의 의료여선교사인 엘러스(Ellers)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그 이듬해는 미국감리교 여선교회에서도 하워드(Meta Howard)를 파송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부인병원인 保救女館(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을 창설하였다. 근대의학에 대한 한국인의 긍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치료를 받으려는 부인 환자들이 늘어나자 손이 모자란 선교사들은 한국 여성에게 의료교육을 시켜 진료에 임하도록 해야겠다고 느꼈다. 1891년 10월에 보구여관에 파송되어 온 의료 여선교사 셔우드(Rosetta Sherwood, 후에 Rosetta Sherwood Hall)양은 부임 후 의료강습반을 열어 한국인 4명과 일본인 1명에게 의학강습을 하였다. 여기서 공부한 박에스터(처녀명은 김에스터)가 1896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 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그는 1877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金弘澤의 셋째 딸 김점동으로 태어났고,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가 스크랜턴여사가 여아를 맡아 교육한다는 소문을 듣고 딸을 이화학당의 초기 학생으로 넣었다. 그는 총명하고 영어를 잘 하여 보구여관에서 셔우드의사의 통역과 의료 보조로 일하다가 의료교육을 받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근대 의료교육의 처음이었다. 그녀는 15세에 세례를 받고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이듬해(1893) 5월 24일에 셔우드의사의 약혼자로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하는 홀(William J. Hall)박사를 도와 일하는 신실한 24세의 박유산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고 병원에서 계속 일하였다. 1894년 11월 27일 셔우드의 남편 홀박사가 장질부사로 죽자 셔우드는 한살된 아들을 데리고 뉴욕(New York)州 리버티(Liberty)의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박에스터는 그녀에게 함께 데려가 주기를 간청하여 미국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94년 12월에 셔우드를 따라 남편과 미국으로 간 에스터는 1895년 2월에 리버티의 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열심히 공부하고 동 9월에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뉴욕시의 유아병원에서 1년 이상 일하고, 1896년 10월 1일에 현재의 존스 홉킨즈(Johns Hoppkins)대학의 전신이었던 볼티모어(Baltimore)의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하였다.796)梨花女子高等學校, 앞의 책, 73∼75쪽.
셔우드 홀,≪닥터 홀의 조선회상≫(金東悅 譯, 東亞日報社, 1984), 96∼99·100∼118·135·144∼146·158쪽.
남편은 돈을 벌어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그녀의 졸업 21일 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에스터는 미국에서 좋은 일자리에 안착할 수도 있었으나 곧 귀국하여 여성들에게 예수를 전하며 의료사업을 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귀국 후 자신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선교사 홀부인(셔우드)이 그의 귀국에 앞서 남편 사업을 잇기 위하여 다시 한국의 평양으로 와서 의료 선교사업과 맹아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의료활동을 하였으며 또 황해도 지역의 순회전도사로서의 활약도 하였다. 의사이면서도 분주한 전도생활 등으로 자신의 건강을 돌볼 겨를이 없던 그녀는 1910년 4월 14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의료 선교를 통한 한국내에서의 여성 의료인 배출은 간호사가 의사보다 더 필요하고 교육도 보다 용이하였다. 1902년에 에드먼즈(Margaret Edmunds)양이 우리 나라 최초의 간호 선교사로 내한하였는데, 그녀는 동년 12월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간호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첫 학생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또 한 손가락이 없고 질투심 많은 남편한테 코를 물어 뜯겨 코 한쪽이 없는 여성이었고, 두 번째 학생은 병원의 환자였었던 심한 절름발이였다. 또 조혼의 관습때문에 괜찮은 젊은 여성을 간호원으로 확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고, 또 간호직을 천시하여 간호원 확보는 더욱 어려웠다고 했다.797)蔡富仁, 50 Years of Light(美監理敎會婦人宣敎部, 1938), 6∼7쪽. 이 같은 정황에서 간호원 대관식이 처음 행해진 것이 1906년 1월 25일이었고, 1908년에 두 명의 졸업생(김마태와 이그레이스)을 정식으로 배출하였다. 1906년에 세브란스병원에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고, 박에스터의 여동생 김벳세798)梨花女大 韓國女性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55쪽.가 동 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박에스터가 당당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의료선교사의 활동이라는 여의사 모델이 있었고 또한 선교회라는 문을 통하여 외국유학이 가능하였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여성들이 비록 의사가 되어 사회진출을 하기 원한다 해도 그 뜻을 받아 가르칠 교육적 여건이 거의 갖추어지지 못하고 있었다.≪제국신문≫1899년 5월 19일자<녀인셩심>에 의하면 북촌 교동 사는 총명하고 혜철한 한 여성이 학문 배우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의학교 설립 소식을 듣고 의학을 공부하면 사회에 나아가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학교장 池錫永을 찾아가 입학하기를 청하였으나, 남녀가 동학할 수 있는 章程이 없어 입학시킬 수가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여자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야 했다. 1906년 5월에 李春世·李匡夏 등이 同濟醫學校를 설립하고 5명의 선생(그 중 1인은 姜弼周 부인 김씨)으로 남녀 兩 학과를 두고, 교과는 의학·국한문·산술·물리학·외국어학을 과하는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799)≪皇城新聞≫, 1906년 5월 31일,<同校趣旨>.. 여학생이 몇 명이나 입학하여 사회에 배출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초의 여의사 교육기관이 존재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또 의료활동에서 간호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어서 廣濟院에서는 1906년 8월, 간호학교를 설치하여 “간호에 종사하면 문명에 진보하고 자기 衣食之道에 유익하다”800)≪皇城新聞≫, 1906년 8월 2일,<廣濟院振興>.면서 학생을 모집하였다.

 근대 의료 보급에 따라 전국에 종두를 실시하게 되자, 여자 종두사들이 필요하였고, 출산을 도와줄 산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에 1907년 大韓醫院 관제가 정비될 때 산파 및 간호부양성소가 설립되어 정식으로 간호부를 교육하여 배출하였다.801)≪皇城新聞≫, 1908년 6월 28일,<看護婦見習>.
≪大韓每日申報≫, 1908년 7월 30일,<看護婦募集>.
새로운 의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도 높아 1909년 6월 대한의원에서 여성종두사를 모집할 때는 서울 관내에서만 40∼50명이 지원하였다.802)≪皇城新聞≫, 1909년 6월 1일,<看護資格>;6월 6일,<婦人醫學志願>. 여성의료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으로 사립 助産婆양성소들도 설립되어 산파를 배출하였다. 1909년 7월 위생국 조사에 의하면 산파 33명, 간호부 33명이라고 했다.803)≪皇城新聞≫, 1909년 7월 23일,<衛生狀態調査>. 수적으로는 많은 것이 아니나 의료계로의 여성 진출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1910년대의 외국유학 여학생 중 의학교 입학자가 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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