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5. 의·식·주생활의 변화
  • 2) 음식
  • (1) 식생활 환경의 변화

(1) 식생활 환경의 변화

 외국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상호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점차로 외래의 음식 문화가 유입되었다. 일부 상류층은 서양요리·중국요리·외국 술·서양과자·가공된 식품 등 새로운 외국의 음식 문화에 접하게 되었다

 일본과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식품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일본으로의 수출 품목은 쌀·콩·보리·인삼 등의 농산물이었고, 일본에서의 수입은 주로 향료·조미료·담배 등이었다.933)강인희,≪한국식생활사≫(삼영사, 1990), 386쪽. 청국과는 개항 이전에 이미 의주·경원·회령 등에서 1년에 2회 열리던 개시무역에 의해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항 이후에는<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의주와 회령에 세관을 설치하고, 수출입세로 상품 가격의 5%(단, 홍삼은 15%)를 징수하는 제도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홍삼을 제외한 다른 식품은 세금을 물지 않고 수출이 가능하였으므로 청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청국으로 수출한 것은 인삼·해삼 등이고, 수입한 것은 茶·녹용 등이었다.934)강인희, 위의 책, 387쪽. 러시아와의 교류는 수입보다 수출이 많았다. 우리 나라의 수출 품목은 두류·귀리·조·담배·해삼·어류·어란 등이었다.935)강인희, 위의 책, 387쪽.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기에 들어서 장시망이 전국적으로 발전하였다. 전북의 전주장과 함남의 원산장은 그 좋은 예이다. 시장망의 확대로 지역간의 식품 교류가 크게 증가되었다. 개천의 읍내장에서 산간 지대의 농산물과 바닷가의 해산물이 교류되었고, 평북 강계장에서는 지방의 사물인 녹용·삼·꿀들과 덕천의 철, 선천의 도자기 등이 유통되었다. 원산시장에서는 이 지방 일대의 생산물이 집결되어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황해도 토산의 비천장에서는 六鎭지방의 삼베와 원산지방의 마른 고기 및 미역 등 해산물이 유통되었다. 또한 서울의 이현(동대문안), 종루(종로 근방), 칠패(남대문밖) 등 3대 시장에서는 각지에서 몰려온 곡물 상인들이 거래를 하였다.936)강인희, 위의 책, 386쪽.

 또한 19세기 말경 납청에는 놋그릇 수공업 공장이 30여 개나 되었으며, 1897년 서울에 합자회사인 ‘조선유기상회’가 조직되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놋그릇은 津頭 상인들의 손을 거쳐서 각 지역으로 퍼짐으로써 일반인들도 필요에 따라 구입할 수 있었다.≪朝鮮의 窯業≫에 의하면 1895년경에 도자기 공장이 21개소였고, 옹기류 공장은 13개소가 있었다 한다.937)강인희, 위의 책, 407쪽.

 식사법에 있어서의 변화도 보이는데 1885년 전후하여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한자리에서 나란히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시작되었다.938)김숙희,≪먹는 즐거움, 먹는 두려움≫(정우사, 1982), 187쪽.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같은 상에 나란히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을 여행한 비숍은 “여인들은 아무렇게나 먹고 자기 남편들이 먹다 남긴 것을 먹어 치우는 것이 통례였다. 남자들의 모든 식사는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돌아가는 몇 센치미터 높이의 작고 둥글고 어두운 색의 나무상에 차려졌다”고 했듯이, 남자들은 외상 차림으로 대접하였지만 서민의 부녀자들은 상에 차려 먹는 일이 드물었는데,939)이사벨라 버드 비숍 著, 이인화 譯,≪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살림, 1994), 101쪽. 이러한 식사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00년대에 서양 영양학이나 서의한역서 등이 소개되면서 서양에서의 영양·보건은 동양과 관념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후 부산·인천·원산·서울에 일본인에 의한 서양식 병원이 생기고, 1886년에 제중원이 생기어 서양의술교육이 시작되면서 서양 영양학의 지식이 많이 소개되었다. 1895년에는 일본인 의사가 조선인의 日常食을 현대 영양학적으로 처음 조사하였다.940)이성우,≪한국 식생활의 역사≫(수학사, 1992), 216쪽.

 당시 서울에 인구가 많아지면서 우물이 없는 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아침에 두 지게, 저녁에 두 지게씩 하루 네 지게를 길어다 주는 것이 보통인데 물값은 보름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계산했다. 동업자 조직을 만드는 등 근대적 상인정신을 가진 집단으로 특히 북청 출신이 많았다.941)이성우, 위의 책,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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