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Ⅰ. 근대 교육운동
  • 3. 근대 교육의 확대
  • 5) 교육내용의 추이
  • (2) 창가와 체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2) 창가와 체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唱歌라는 말은 신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 독일어의 ‘리이드(Lied)’, 영어의 ‘송(Song)’을 한자로 번역한 데서 유래하는데 실제로는 찬송가에서 시작된다. 구한말의 어둡고 괴롭던 시절 우리의 선배들은 스스로 창가를 지어 학생들에게 부르게 하고 민족의 가슴에 용기를 심어 주며 구국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얼’을 깨우치고 나라를 찾자는 피섞인 외침의 소리가 담겨져 있다.

 초기의 창가 중 이필균 작의<自主獨立歌>는 이러하다.

아시아에 대조선이   깊은 잠을 어서 깨어

자주독립 분명하다   부국강병 진보하세

에야에야 애국하세   남의 천대 받게 되니

나라 위해 죽어 보세   후회막급 없이 하세

 위의<자주독립가>의 내용에는 자주독립·부국강병 등의 열렬한 외침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 國歌 대신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애국가>가 이 시기에 애창되었음은 물론이요, 그 밖에도<少年男子歌>와<少年冒險猛進歌>그리고≪유년필독≫에 실려 있는<독립가>와<血竹歌>가 널리 애창되었다. 이 노래들은 모두 애국심의 고취, 국권회복 등의 사상을 담은 것이었다. 이 중에서<소년남자가>를 보면 민족정신이 얼마나 팽창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1.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萬人 敵對 연습하여 후일 戰功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2. 忠烈士의 더운 피 순환 잘되고

  독립군의 팔다리 민활하도다

  벽력과 斧鉞이 唐前하여도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네

3. 海戰과 陸戰의 모든 유희를

  차제로 흥미 있게 승부 決하니

  개선문 뚜렷이 열리는 곳에

  勝戰鼓를 울려라 둥둥둥둥둥

  (≪皇城新聞≫, 1909년 3월 21일).

 이 때 자주정신과 청소년의 기개를 북돋우는<소년모험맹진가>도 자주 불렸다. 이 창가는 제목부터 대단히 격렬하다. 그 내용에는 항일적 기개가 씩씩하게 담겨져 있다.

1. 2천만 동포 우리 소년아      국가의 수치 네가 아느냐

  천부의 自由松은 차가 없거늘    우리 민족 무삼 죄로 욕을 받는가

2. 나라 사랑하는 자 적지 않건만   모험맹진하는 자 몇이 되느냐

  깰지라 소년들아 험한 마당에    조금도 사양말고 달려 나가세

  (趙容萬 外,≪日帝下의 文化運動史≫, 民衆書館, 1970, 254쪽).

 이<소년모험맹진가>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주저말고 나가 싸우라는 도전적 기개를 노래한 것이니 그 싸움의 상대는 바로 일제침략이었다. 이런 항일적 기개는≪해조신문≫과≪大韓日報≫의<運動歌>에도 나타나 있다.

 위의 노래들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倭敵들을 쳐부수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찾자는 드높은 기개와 굳은 의지가 넘치고 있는 내용들이다.

 唱歌集 속에 있던 이색적인 노래로는<그리스도 軍兵歌>를 들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저항 민족정신’은 각별한 것이었음을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大將 예수님은 전능하시니   怨讐寃鬼 무서워 말고 接戰해 보세

큰 勝戰할 때까지 앞에 나가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세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세     魔鬼悌勢를 멸하세

 미션학교와 교회는 이 노래를 강조하여 가르쳤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군대가 되어 일제를 공격하라고 격려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미션학교에 있어서 교육의 성격도 종래에는 算數·物理·化學·地理 등이 신기한 과목으로 학생들의 호기심을 끌어 왔지만 1905년 이후에는 ‘국권회복’의 운동으로 창가와 체조가 주요한 학과목이 되었다. 창가는 본래 기독교의 찬송가에 기인하는 것이다. 미션학교 학생들은 그들의 찬송가에서, “믿는 사람들아 軍兵같으니 앞에 가신 主를 따라 갑시다” 또는 “그리스도 군사 앞서 나가세 싮자깃발 들고 戰場에 가듯”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학생들의 ‘항일 민족정신’을 의미한다. 이 때는 또 전국을 휩쓸던 愛國歌·國債報償歌·獨立歌의 전성시대였다. 물론 일제통감부는 이러한 창가를 그들이 말하는 소위 ‘불온창가’라 하여 금지하였다. 당시 찬송가는 애국운동의 매개로서 이 나라 ‘내셔널리즘’의 기치가 되었고 종교적 성향과 함께 이 민족의 고동이었다.

 그리하여 순수한 예배의식에서 떠나 자주독립을 표현하는 노래형태로 변모했다. 따라서 찬송가에서 시작된 창가도 역시 한말 내셔널리즘의 기치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찬송가에서 시작된 창가는 風雲과 亡國의 비통한 운명 속에서 싹튼 종교적 성향과 내셔널리즘의 표현이었으며 찬송가와 함께 한말 우리 민족역사의 단편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창가는 단지 ‘부르는 노래’였다기 보다 벅찬 민족의 고동이었으며 자주독립을 외치던 우리 민족의 ‘얼’이며 함성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 당시 근대 사학이 또 한 가지 강조하여 실시한 것은 體力의 훈련이었다. 당시의 학생들도 민족의 선각자이자 또한 독립운동의 주인공이었다. 그러기에 학교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토론회·웅변회·운동회 같은 행사를 마련해 단체훈련을 하고 그들의 意氣를 높였다.

 그리고 이 때의 체육은 단순한 스포츠를 단련한 것이 아니고, 일보 전진하여 구국운동의 일익을 담당케 했다. 운동회 때는 의례 ‘대한독립만세’란 철자경기를 시켰으며 ‘독립가’를 부르게 했다. 특히 1907∼1910년 사이에 있어서는 춘·추계로 학교연합 대운동회가 행하여 졌다. 이 운동회가 규모가 클 때는 한 道內 각 군의 학교 전부가 연합하여 대규모의 연합운동회를 행하였는데 대개 그 비용은 그 도민 전체가 부담했다. 그 당시 운동회야말로 우리 민족의 울분과 교육구국의 의지를 분출시키는 민족투지의 광장이었다. 그러기에 일제통감부 관계자들은 이 연합 대운동회에서 청년학도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行步하는 모습을 ‘武裝的 示威’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학교체육은 兵式敎鍊과 다름이 없이 강행되었다. 당시 체육 및 교련교사는 모두 무관 출신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지도하던 인사였다. 그들은 을사조약 이후 각 곳에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지원하면서도 후일의 결전을 기약하기 위하여 사립학교에 배치된 구국운동의 전위대였다. 그리하여 으레 학교에서는 군대 나팔과 북으로 된 악대가 조직되어 있었고 이 악대가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가운데 학생들은 목총을 메고 군대식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군사훈련의 경기를 통하여 국민의 사기를 북돋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는데 이를 지켜본 당시 한 선교사는 아래와 같이 보고하고 있다.

어떤 학교들은 교련과 체조에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江西에서 온 학교가 평양에서 열린 4월 운동회 때 道長官이 주는 1등상을 탔다. 이 학생들은 말쑥한 복장에 十字 章을 양 어깨에 달고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군대 배낭같이 만들어 등에 지고 와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1906년 義州에서는 병식 체조교련을 받기 위해 교외를 행보하던 학도와 일본군대 사이에 충돌사태가 벌어졌으며 1908년 5월에는 의주 일본수비대와 학생간의 충돌 사건으로 4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특히 대성학교에서는 체육시간을 제일 중히 여겨 군대식으로 학생을 교련하였다.

 도산 안창호가 이렇게 대성학교에서 체육을 강조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 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도산이 말하는 힘-실력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국민의 실력’ 즉 民力이었다.

 이 때 박은식도 학교에서의 체육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교육이 지나치게 文弱에 빠졌다고 보고, 학교 교육에서 체육을 강화함으로써 강건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학생들에게 씩씩한 尙武精神을 갖추도록 함으로써 교육구국운동의 인재를 기르기 위함이었다.

 데밍(C. S. Deming) 목사는 당시 학생들의 군사훈련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서 교련 시범을 보인 바, 그 정확하고 一致한 동작은 다른 어떤 군대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이 체조가 끝난 뒤에 학생들은 3개 중대로 나뉘어서 한 중대는 진지를 지키고, 나머지 두 중대는 이를 공격해 왔다.

그들은 폭죽과 흰 공, 붉은 공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한참 동안 城 주위에서 棧動하는데 進功 작전, 후퇴 작전, 돌격, 접전, 적십자 활동 등을 하며 격전을 벌이면서 城을 함락시키고 태워버림으로 끝을 냈다(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Pyen Yong;Union Christian College Press, 1929, p. 329).

 이 같은 체조나 운동회는 바로 교육구국운동을 말해 준다. 이에 대해 학부차관 다와라는 그 목격담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앞서 내가 평양에 가서 목격한 평안남도 一圓의 학교연합 대운동회는 비단 그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함부로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려 완연한 武裝的 시위의 운동회였다(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Ⅰ, 1967, 301쪽).

 이와 같이 한말 근대 사학에서 실시한 운동회 및 체육은 일제에 대한 저항세력을 양성하는 과정이었으며, 당시의 교육내용의 추이를 파악하는 단서이기도 하였다.

<孫仁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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