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1) 국문연구소에 관한 자료

(1) 국문연구소에 관한 자료

 국문연구소는 학부대신 李載崐의 청의로 각의를 거쳐 1907년 7월 8일에 학부 안에 설치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正音廳(諺文廳)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국문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적 기관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 문화사상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반드시 국가적 기관이라야 중대성을 띤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국어 국문에 대한 자각이 싹트고 이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국문의 연구를 위해서 협동적인 노력을 이룩했던 최초의 기관이라는 데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 뒤 일본제국주의의 압박 밑에서 조선어학회와 같은 민간학회가 조직되어 국어·국문의 통일 사업을 완수했는데, 이것이 국문연구소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임을 생각할 때 국문연구소의 역사적 의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국문연구소는 일찍부터 국어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이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 어떻게 결말을 지었는지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국문연구소에 관해서는 일인학자 오쿠라(小倉進平)가 그의≪朝鮮語學史≫(1920)에 간단하게 써 놓은 것이 있을 뿐이어서 우리 나라 학자들도 이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문연구소의 직접적인 자료로는 金允經이≪朝鮮文字及語學史≫(1938)에 실은<硏究案>(油印)의 일부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앞으로 이 글에서 밝혀지겠지만, 국문연구소는 그 토의과정에서 위원들이<연구안>을 제출하면 그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주었고(처음에는 위원들이 다시<參互硏究案>을 내어 이것도 등사하여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에는 국문연구소의 사업을 마무리짓는<보고서>를 제출했었다. 이 보고서는 각 문제에 대한 위원들의 표결의 결과를 종합하여<의정안>을 작성하고 여기에 각 위원의 최종적인<연구안>을 첨부한 것이었다.

 불과 90여 년 전의 일임에도 이런 자료들의 행방이 묘연했었는데, 이 자료들이 모두 보존된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위에 말한 토의과정의 자료는 당시 국문연구소 위원이었던 주시경이 간수했던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발견되었고(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六堂文庫), 報告書 一件 書類는 일본에서 발견되었다(東京大學 小倉文庫). 이로써 국문연구소에 관한 모든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 것이다.358)國文硏究所에 대한 자세한 것은 李基文,≪開化期의 國文硏究≫(1970)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