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4) 문법의 연구
  • (2) 유길준의≪대한문전≫

(2) 유길준의≪대한문전≫

 우리 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문법에 관심을 가져 문법책을 저술한 사람은 兪吉濬이었다. 그 자신의 말(1909년에 간행된≪大韓文典≫의 緖言)에 의하면 그가 처음 국어문법의 초고를 쓴 것은 1881년 일본에 유학갔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뒤 여덟 번이나 원고를 고쳐 썼다고 한다. 이 초고 중에서≪朝鮮文典≫이란 이름이 붙은 두 책이 지금 전하고 있다.

 이 필사본 중의 하나에는 “光武 八年 六月”(1904)이란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역시≪朝鮮文典≫이란 이름의 油印本이 있는데 그 끝에 1906년 5월에 이 책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보다 앞서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이 1907년에≪少年韓半島≫란 잡지에 연재되었다.362)여기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저자 兪吉濬이 일본에 망명중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유길준의 문법이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은 융희 3년(1909)이었다. 이것은≪大韓文典≫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융희 2년(1908)에 崔光玉의 저서로≪대한문전≫이 간행된 것이 있다. 이것은 유길준의≪대한문전≫보다도 오히려 1년이 앞서는 것으로, 종래 우리 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문법책이라고 일컬어져 온 것이다. 최광옥은 당시에 널리 알려진 애국지사요 기독교 신자로 황해도에 학교를 세워 민중교육에 힘썼으며, 大成學校 교장을 지낸 일도 있는데 그의 이 책의 내용은 위에 말한 유길준의≪조선문전≫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유길준도 그의≪대한문전≫서언에서 자기의 제4차 원고본이 세상에 흘러나가 간행되었다는 뜻의 말을 하여, 최광옥의≪대한문전≫이 자기의 원고본에 의한 것임을 비친 바 있다.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유길준이 1881년 일본에 유학했을 때 그의 국어문법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문법의 기본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어 문법을 그의 국어 문법의 모델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뒤 미국에도 유학했으나 그의 문법에서 영어문법의 직접적 영향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국어의 구조가 일본어와 비슷하고 영어와는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유길준은 1896년부터 1907년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이 동안에 그의 문법책이 완성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사실상 그의≪대한문전≫은 전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체류시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유길준의 국어문법 연구가 일본어 문법의 영향을 받은 것은 우선 책 이름으로 ‘文典’이란 말을 쓴 것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나온 일본어 문법책들은 다 그 이름에 ‘문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길준이 처음 유학시에 참고한 것은 나카네(中根淑)의≪日本文典≫(1876)이었고 나중 망명시에 그의 원고를 고칠 때 주로 참고한 것은 그 무렵에 간행되어 널리 읽힌 오쓰키(大槻文彦)의≪廣日本文典≫(1897)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밖에도 그의≪대한문전≫에는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몇몇 문법책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일본어 문법 연구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유학에서 문법에 대한 관심이 싹텄던 유길준이 19세기 말엽 미국에 유학하면서 언어학과 영어 문법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의≪서유견문≫에 보면 제13편 ‘學業하는 條目’에 ‘言語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주로 실용적인 외국어의 학습 내지 연구로 이해한 것 같다. 다만 “各國의 言語를 比較하여 그 根本의 異同을 考究함이라”고 한 끝 구절은 그가 비교언어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대한문전≫은 우리 나라 문법연구의 초창기로서, 모방의 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유길준의 모델이 된 일본어 문법들 자체도 모방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초창기에 있어서는 모방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길준이 여덟 번이나 원고를 고쳐 썼다는 것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유길준은 우리 나라 최초의 문법가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대한문전≫은 그 뒤의 문법가들에게 이렇다할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의 문법은 주시경의 그것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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