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5) 주시경의 국어 연구

5) 주시경의 국어 연구

 위의 서술에서 우리는 주시경의 국어 연구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말해 왔다. 여기서 그것을 종합하여 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주시경은 이른바 개화기를 대표하는 국어학자였고, 그 뒤의 국어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앞에 쓴 것과 다소 중복되더라도 그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서 여기에 종합적으로 논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주시경(호 한힌샘)은 1876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나서 망국의 한을 겪은 지 5년째 되던 1914년에 세상을 떠났다. 38년 7개월의 짧은 일생이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12세 되던 해였다고 하지만, 그 당시의 새로운 학문에 접하게 된 것은 18세 되던 1893년이었다.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이 해에 배재학당의 강사인 朴世陽·鄭寅德에게 산술과 만국지지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 의하면(≪國語文典音學≫) 이보다 한 해 앞서 17세 되던 해에 英文 萬國地誌를 학습하면서 영문의 자음과 모음을 알게 되어 그 지식으로 국문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 이미 ‘ㆍ’가 ‘ㅣㅡ’의 합음이라는 학설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1년의 착오가 있는 듯한데, 그의 이력서가 옳은 것으로 본다면, 이 학설을 세운 것은 그가 배재학당에 입학하던 해요 또 갑오경장이 있었던 해였다. 그 뒤 1900년까지 그의 교육은 주로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학생이면서 이미 사회인이요 지사로 인정을 받아 1896년 독립신문사의 일을 보게 되었고 1897년에는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학자였다. 독립신문사의 일을 보게 되자 곧 그는 신문사 안에 國文同式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국문의 연구 단체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는 이 회에서 ‘ㆍ’에 관한 자기의 결론(‘ㆍ’는 본래 ‘ㅣㅡ’의 합음이라는 것과 이것은 폐지해야 한다는 것)과 받침에 관한 새로운 원리(‘ㄷ ㅌ ㅈ ㅊ ㅍ ㅎ’과 ‘ㄲ ㄺ ㄿ ㄻ ㅀ ㄾ ㅄ ㄵ ㄳ’ 등을 써야 한다는 것)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너무나 시대에 앞선 것이어서 동조자가 없었다. 한편 그는 이 무렵에≪국어문법≫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98년에 이것을 일단 완성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의 일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어·국문을 연구하는 학자요 교육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뚜렷해졌다. 그는 서울 안의 어느 학교에서나 거의 자청하다시피 하여 가르쳤으니, 낮뿐 아니라 밤에는 야학, 일요일에나 방학에는 강습소를 열어 국어·국문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였다. 그는 이 방면의 연구 단체라면 빠진 일이 없었다. 그 중 국문연구소의 위원으로 활약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저술에도 큰 힘을 기울였으니, 그 중에서도≪국어문법≫은 그의 필생의 저작이었다. 그의 첫 저작인≪대한국어문법≫(1906)과 둘째 저작인≪국어문전음학≫(1908), 그리고 마지막 저작인≪말의 소리≫(1914)는 모두≪국어문법≫중의 ‘音學’(요즈음 술어로는 음운론)이 독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국문연구소 최종 연구안도 국문에 관한 훌륭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朝鮮光文會(1910년 창설)에서 국어사전을 편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전은 완성을 보지 못했으나 우리 나라에서 맨처음 있은 국어사전 편찬이었다.

 주시경의 학문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큰 감명을 받는 것은 그 조숙성과 독창성이다. 조숙성은 그 당시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 아니지만, 독창성은 견줄 만한 예를 찾기 어렵다. 배재학당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국어 연구는 거의 독학이었는데, 그가 국어 연구에서 도달한 높은 수준의 독창성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저서들을 볼 때, 주시경은 국어 음운연구에 시종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이에 큰 자부심을 가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말의 소리≫은 국어 음운론에 관한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여러 저술에 나타난 음운 이론은, ‘ㅋ ㅌ ㅍ ㅊ’은 ‘ㄱ ㄷ ㅂ ㅈ’과 ‘ㅎ’의 섞임이라고 본 것을 비롯하여, 독창적인 견해로 가득차 있다. 그 중에서도 ‘本音’과 ‘臨時의 音’의 이론은 크게 주목된다. 저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설명하면, ‘꽃이’ 할 때에는 ‘ㅊ’이 제대로 발음되지만, ‘꽃만’ 할 때에는 ‘ㄴ’으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임시의 음’이요 ‘본음’은 어디까지나 ‘ㅊ’이니 우리가 글을 쓸 때에는 이 ‘본음’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이 이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주시경 자신이 가장 강력히 주장한 음운 이론이었으며 또 오늘날 새로이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이론이다. 이 ‘본음’과 ‘임시의 음’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미국 언어학에서 발달된 생성음운론에서 말하는 기저표시(underlying representation)와 음성표시(phonetic representation)에 각각 일치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그의 통찰력이 얼마나 날카롭고 깊이 있는 것이었던가를 보여 준다.

 한편 그의≪국어문법≫이 국어의 문법체계를 자못 독창적으로 파악했음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여기서 일일이 말하려 하지 않지만, 그의 마지막 저작인≪말의 소리≫에 보이는 ‘늣씨’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1930년대 이래 현대 언어학에서 발달해 온 형태소(morpheme)란 개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착상에 그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음이 흠이라고 하겠다.

 주시경의 정성어린 국어 연구와 그 보급을 위한 헌신적 노력의 밑받침이 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의 학문과 교육은 애국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애국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한 일화가 있다. 그는 배재학당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었는데, 1906년 崔益鉉追悼會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력침략보다 정신침략이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날로 大倧敎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망국의 비운을 막을 수 없는 형세 속에서 그의 焦悶은 날로 커갔다. 특히 105인사건으로 동지들이 많이 투옥된 뒤로는 더욱 그랬다. 그는 결국 이 초민 속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李基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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