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3. 한국사 연구
  • 3)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한말·일제하 한국인에 의해서 계몽주의 단계의 역사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채 확립하기도 전에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 침투하였다. 한말 계몽주의 사학은 근대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침투하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때로 한계가 노출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 식민주의 사학이 본격적인 채비를 차리고 있을 때, 한국인 역사가들 중에는 식민주의와 근대성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일제 관학자들의 위장술에 그대로 놀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에 그럴듯한 명분을 걸고 관계하는 이들이나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론 등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오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실학시대의 사학이 갖는 실증성과 계몽주의 역사학이 갖는 근대성을 내적으로 수용하여 진전시키는 한편 식민주의 사학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간 역사학자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박은식·신채호를 비롯하여 金敎獻(1868∼1923)389)韓永愚,<1910年代 李相龍·金敎獻의 民族主義的 歷史敍述>(앞의 책, 1994).·李相龍(1858∼1932)390)尹炳奭,<石洲遺稿>(≪韓國近代史料論≫, 一潮閣, 1979).
韓永愚, 위의 글.
·黃義敦(1887∼1964)391)朴永錫,<海圓 黃義敦의 民族主義史學>(≪汕雲史學≫創刊號, 1985).
沈勝求,<해원 황의돈의 역사학연구>(≪北岳論叢≫9, 1991).
조동걸·한영우·박찬승 엮음<황의돈>(≪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비평사, 1994).
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역사학적 성향은 강렬한 민족주의 의식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학이 강렬한 민족주의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사상에서 근대성이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다. 단지 이들 중 몇몇 분들에 의해서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이 태동·발전하였고, 근대역사학이 이념적으로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세계 학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준을 높였던 것은 사실인만큼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는 근대민족주의 사학과 관련하여 박은식과 신채호만 거론하고자 한다.

 한말 일제강점 초기에 이르면 우리 나라의 역사학이 이념면에서나 방법론에서 질적인 고양단계에 이르게 된다. 박은식에 의해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태동되고 신채호의 의해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은식(1859∼1925)392)백암 박은식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
이만열,<朴殷植의 史學思想>(≪숙대사론≫9, 1976).
―――,<民族史學>(≪韓國史≫22, 국사편찬위원회, 1978).
―――,<民族主義史學의 韓國史認識>(앞의 책, 1981).
愼鏞廈,≪朴殷植의 社會思想硏究≫(서울대 출판부, 1982).
은 한말 해서지방에서 ‘朴夫子’라는 명성을 가졌을 정도로 주자학자로서 發身하였던 학자다. 그러나 그가 상경하여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고 언론계에 종사하게 되었을 때, 급변하는 시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드디어 양명학으로 옮겼다. 뒤에 그가<왕양명실기>을 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한말 언론·교육·사회운동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때때로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하여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잡아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한말≪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 신문과≪서북학회월보≫·≪서우≫등의 잡지에 역사관계 논설과 논문을 발표하여 민중을 깨웠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자 1911년 망명길에 올라 고구려의 고도요 발해의 유적지이기도 한 桓仁縣에서 이듬해 3월 그곳을 떠나기까지≪東明王實記≫·≪泉蓋蘇文傳≫·≪明臨答夫傳≫등을 구상 혹은 집필하였다. 이 때 대종교의 尹世復의 집에 우거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역사의식에는 단군숭배의 강렬한 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1914년에는 상해에서≪安義士重根傳≫과≪韓國痛史≫를 집필하였고,≪한국통사≫는 그 이듬해 상해에서 간행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령 雙城子에서≪渤海史≫·≪金史≫를 역술하고≪李儁傳≫을 저술하였다. 3·1운동 이후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기 시작하여 1920년에 이를 간행하였고 이 무렵에 스스로 完史라고 자부한≪李忠武舜臣傳≫을 저술하였다.

 白巖의 역사서술에서 전기류와 고대사에 관한 것도 없지 않지만, 돋보이는 것은 근대사연구다. 그의≪한국통사≫는 대원군 이후의 우리 나라가 멸망해가는 과정을 일제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 것이고,≪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부터 3·1운동을 거쳐 1920년의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두 책은 한국의 근대사를 최초로 정리한 것으로 근대사 연구의 고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그 가치가 높다.

 그의 저술에 나타난 박은식의 사학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주목되는 것은 國魂 중심의 사학 정신이다. 그는≪한국통사≫에서 나라의 멸망과정을 썼지만, 그 서언에서 역사를 쓰는 목적이 민족의 정신 즉 神을 보존함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形’이나 역사는 ‘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훼파되었다고 하나 ‘신’은 가히 홀로 존재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통사≫를 만드는 소이이다.

 박은식이≪통사≫의 서언에서 지적한 ‘신’은≪통사≫의 결론에서는 ‘魂’이라 하였는데, 이는 국가를 이끄는 정신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서언에서 말한 ‘형’은 국가를 형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에 해당하는 ‘魄’을 의미할 것이다.

 박은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를 ‘혼’과 ‘백’으로 보았다. 즉 국교·국학·국어·국사를 혼으로, 전곡·차승·성지·선함·기계를 백이라 하였다. 그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요소가 다 필요한 것이라 하고 그 중에서도 물질적인 ‘백’보다는 정신적인 '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민족정신인 ‘신’ 또는 ‘혼’이 살아 있는 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야만적인 모습을 벗어나 도덕·논리·정교·법제 등의 국가 제도를 이룩함에는 역사만한 것이 없으며 역사가 존재하는 곳에는 국혼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가 국혼의 소재처인 국교·국사가 망하지 않는 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사를 쓰는 목적은 바로 나라를 잃은 백성에게 국혼의 소재처인 자기 역사를 환기시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박은식 사학의 특징은 역사서술 체제와 내용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근세신사’의 체제를 따라 서술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말 사학이 갖고 있는 전근대성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박은식의 사학은 그의 주저인≪통사≫·≪혈사≫의 시대구분이나 가치평가에서 자주적이며 진보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 그가≪혈사≫에서 민중을 적극 수용한 것도 그 하나라고 할 것이다.

 박은식 사학의 특징은 세째로 영웅사관을 일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교적 그의 역사학의 초기 단계에서 보였던 것으로 일제 강점 초기에 저술한 전기류(천개소문전, 몽배금태조, 김유신전, 안의사중근전, 이준전, 동명왕실기, 명림답부전 및 이충무순신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박은식도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의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영웅이 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영웅이란 ‘국가의 간성이요 인민의 사령’이었다. 이러한 영웅대망의 역사관은 뒷날 민중을 역사의 주역이라고 인식하는 역사관으로 서서히 바뀌어가지만, 비록 초기였지만 그가 한때나마 영웅사관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역사학의 한계였다고 생각된다.

 국혼 중심의 강력한 민족주의의식에 근거한 박은식의 역사학은 ‘옛것에 근본을 두고 새것에 참여한다’는 ‘舊本新參’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 역사서술의 근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를 인식하는 면에서는 ‘영웅’을 상정하고 거기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는 등의 한계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박은식의 역사학은 ‘계몽주의 역사학’의 단계에서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넘어가는 가교적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은 丹齋 申采浩(1880∼1936)393)신채호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이만열,<단재 신채호의 고대사인식 시고>(≪한국사연구≫15, 1977).
―――,<민족주의 사학의 한국사인식>(≪한국사론≫6, 국사편찬위원회, 1981).
―――,<民族史學>(≪韓國史≫22, 1978).
―――,<丹齋史學의 背景>(≪韓國史學≫1, 정문연, 1980).
―――,<단재사학의 배경과 구조>(≪창작과비평≫56, 1980).
―――,<民族主義史學의 韓國史認識>(앞의 책, 1981).
―――,<丹齋 申采浩의 역사연구방법론>(≪산운사학≫1, 1985).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硏究≫(문학과지성사, 1990).
에서 성립된다고 할 것이다. 신채호 역시 주자학의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철저하게 주자학을 비판하는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한말≪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 언론계에 종사하며<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등의 논설로 역사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에게는 역사야말로 ‘애국심의 원천’이었다. 그는 또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상체계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역사학연구와 연결시켰다. 그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애국심의 기초였던 역사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키는 한편 근대역사학의 이론을 개발함으로써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는 먼저 백성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에 梁啓超의≪伊太利建國三傑傳≫을 역술, 간행하고 이태리의 ‘삼걸’과 같은 존재를 우리 역사에서 찾아내기로 하고 1908년부터≪聖雄李舜臣≫과≪乙支文德≫그리고 1909년에는≪東國巨傑 崔都統傳≫을 썼던 것은 이 때문이다. 영웅 호걸들의 전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그의 역사관이 영웅사관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역사연구는 1908년≪대한매일신보≫에≪讀史新論≫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는 한말 계몽주의 사학이 일제의 소위 근대사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국사학 연구의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혹독히 비판하는 한편 민족주의 정신에 근거한 한국사의 체계를 모색하여 이같이≪독사신론≫을 발표하여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은 최남선이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잡지≪소년≫에 전재할 정도로 주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대사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 것으로 이후 ‘단재사학’의 중요한 골간이 되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만주·러시아·북경·상해 등지로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고적답사와 국사연구를 계속하였다. 신채호는 1920년 전후하여≪朝鮮上古文化史≫와≪朝鮮上古史≫·≪朝鮮史硏究草≫등 그의 주저라고 할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신채호는 민족운동가 혹은 사회사상가라기보다는394)운동가 혹은 사상가로서의 신채호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신용하,≪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한길사, 1984).
신일철,≪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고려대학교 출판부, 1981).
그의 저술이 대부분 역사에 관한 것을 남긴 역사가였다. 특히 그의 업적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역사가로서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가로서의 그의 위치는 한마디로 우리 나라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학은 근대역사학의 이론과 방법을 심화시키는 한편 근대 민족주의를 역사학과 접맥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단재사학’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단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천착했고 그의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는 한국고대사 연구나 그의 근대적인 역사학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사관과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395)李萬烈,≪丹齋申采浩의 歷史學硏究≫(문학과지성사, 1991) 참조.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개요만 언급하고자 한다.

 단재의 역사연구는, 현존한 자료에 의하면, 고대사에 거의 국한되어 있다. 이미 거론한 단재의 네 개의 저술(≪독사신론≫·≪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을 보면 거의 고대사에 관한 것이다. 그의 고대사 인식은 부여·고구려 중심의 전승체계와 전후삼한설을 근간으로하여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것을 비롯하여, 단군 인식을 새롭게 정리하고,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단군·부여족의 중국지배와 백제의 해외경략 등으로 새롭게 설정하였다. 특히 단재는 한사군 문제를 고구려 연대삭감 문제와 결부시켜 중국의 한 나라와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투쟁하는 데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위만조선의 문제와 한사군의 위치문제 그리고 남북 兩樂浪說 등을 새롭게 제기하였으며, 郞家사상 등 단재 이전에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된 한국의 고대문화를 단편적인 자료들을 토대로 엮었던 것이다.

 역사관의 문제와 관련, 그는 먼저 역사를<‘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인식하였다. 그의≪조선상고사≫총론의 일절로 알려진,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라는 구절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역사를 사회·민족·국가의 제 요소들이 전개하는 활동들의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이해하였다. 여기서 그가 ‘투쟁’이란 표현을 쓴 것은, 말 그대로 갈등과 투쟁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역사를 움직여 가는 여러 주체들의 서로간의 관계와 각 주체의 내부에 있는 제 요인들의 동적인 관계를 총칭해서 이른 말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들의 관계에는 갈등과 투쟁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가 역사를 여러 주체들의 동적인 관계를 통해 파악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렇게 역사를 ‘아’와 ‘비아’의 동적 관계 속에서 발견하려 한 것은 ‘한말·일제하’라고 하는 상황에서 당시 벌어지고 있던 민족간의 갈등관계가 우리 민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려 한 단재였던 만큼 그는 우리 민족사상 ‘아’와 ‘비아’의 관계에서 가장 자주성을 강하게 나타냈던 고구려를 민족사의 주맥으로 삼고 고구려가 차지했던 만주를 우리 민족사의 주무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아’와 ‘비아’의 관계에서 인식하려 한 단재사학에서 특히 강조하려 했던 점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역사연구 방법이 근대적이라는 것은 한국의 역사학을 전근대에서 근대로 진입시킨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는 구사비판, 사료의 선택과 수집, 사료의 비판 등에서 과거의 우리 나라 역사학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이론을 구사하고 있다. 신채호는 ‘사실의 고증’을 역사학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임무로 생각하고 그 방법을 여러 모로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가 주장한 고증의 방법은 類證·互證·追證·反證 및 辨證 등이며, 그가 제시한 고증의 방법을 역사연구에 실제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언어학적 방법과 지명이동설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주장과 이론을 역사연구에 얼마나 충실하게 적용하려 했는가는 문제가 있지만, 그의 이러한 방법론의 제시만으로도 서양의 근대역사학이 추구하던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역사서술론 또한 방법론으로서 매우 독특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그는 역사서술에서 체계성과 종합성 객관성 및 사실성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역사연구에서 系統과 會通을 구해야 하며 心習을 없애 편견을 제거하며 본색을 존치시켜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단재의 이같은 역사방법론은 이념을 앞세우는 민족주의 사학이 빠지기 쉬운 당위적·교조적인 역사연구와 그 서술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은 근대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서 그의 역사학의 민족주의적 성격 못지 않게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역사학이 근대성과 관련되면서 나타난 중요한 점은 역사의 주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다. 그는 한말 한때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상정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각종 영웅전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고 역사를 발전시키자면 한두 사람의 영웅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국민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그러자면 먼저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국민 즉 ‘신국민’에 눈뜬 것이다. 이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나라가 망하자 그는 역사의 주체를 국민에서 민중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때는 그의 반주자학적 의식이 절정에 달한 때였고,<조선혁명선언>을 쓰는 등 무정부주의와 연계하려던 즈음이었다. 하여튼 그가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이 무렵 세계사에서도 역사의 주체를 바로 민중으로 인식하려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채호가 민중을 통해 민족의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설정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민족주의 사상도 민중에 바탕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역사학 또한 민중을 민족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되는 그러한 민족주의 사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단재는 또한 역사연구에서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인식하던 때에 그의 역사학에서는 정통론이나 대의명분론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리 나라 사학사에서 역사학을 편협한 의리론·정통론과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단재였다. 그래서 그의 다음의 말은, 그의 강열한 민족주의 의식과 전혀 상치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학사에서 ‘역사과학’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주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의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요, 詳言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다(申采浩,≪朝鮮上古史≫총론(≪丹齋申采浩全集≫上, 1977), 35쪽).

 신채호는 평등성에 기초한 민족을 그의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역사학 방법론에서도 근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여 그의 역사학을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신채호 이후의 역사학은 ‘반식민사학’의 형태를 띠고 분화의 길을 걷게 된다. 3·1운동으로 축적된 민족적인 역량이 일제의 더욱 교묘한 통치술인 ‘문화통치’를 맞는 한편 세계사적으로는 유물사관을 기초로 한 공산주의가 국내에 유입·확산되자, 이러한 조류와 관련되어 국내에서도 국사연구가 여러 갈래로 분화되면서 넓은 의미의 ‘반식민주의 사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는 흐름과 유물론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 그리고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 소위 ‘실증주의 사학’ 등 크게 세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 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설명될 것으로 안다.

<李萬烈>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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