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이후 외세의 침략이 더욱 심각해지고 附外 세력의 발호가 날로 극성스러워지자, ‘항일·구국의 急先鋒’으로 기대를 모으던≪대한매일신보≫는 항일·구국의 이념을 펴는 수단으로 문학 작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해 냈다. 이 신문이 그러한 방안을 마련한 것은, 문학 작품이 합리주의적 논리의 바탕 위에서 성립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신문 논설의 한계를 돌파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404)김윤식·정호웅,≪한국소설사≫(예하, 1993), 19∼27쪽.≪대한매일신보≫의 그러한 노력이 실현되어 나타난 것은 ‘사회등’ 가사, ‘사조’란의 시조, 민요 개작 같은 우국의 시가와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 ‘거부오’ 같은 토론체 소설, 애국 전기 작품 등이다. 이 작품들 중에서 작품의 수량과 그에 따라 긴 시간에 걸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사회등’ 가사이다.
‘사회등’ 가사는 4음 4보격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가사의 율격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분연체로 짜여지고 반복구를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가사의 유장하면서도 응집력을 갖지 못한 형태에서 벗어난 양상을 보여 준다. ‘사회등’ 가사의 형태와 함께 이 시가 유형의 중요한 특질을 형성하는 것은 풍자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풍자가 항의하려는 의도에서 태어난, 예술로 다듬어진 항의라면, ‘사회등’ 가사의 풍자는 우리 강토를 유린하는 침략자와 그 침략 세력의 앞잡이로 전락한 부외 세력을 질타하고 공격·비판하려는 의도로 충전된 것이다.
‘사회등’ 가사는 원래≪대한매일신보≫의 고정란인 ‘시사만평’의 성격을 이어받으면서 발생한 시가이다. ‘시사만평’란은 ‘사회등’ 가사 이전에 산문으로 이루어진 만평을 싣고 있었는데, 율문으로 이루어진 ‘사회등’ 가사 작품들로 그 만평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이 신문이 이렇게 ‘사회등’ 가사로 하여금 산문 만평을 대신하도록 한 것은, ‘사회등’ 가사가 갖춘 율문의 감응력이 산문 만평에 비하여 독자들에게 더 생생하게, 더 구체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사회등’ 가사의 편수는 모두 610여 편에 이른다. 이 유형의 시가는 1907년 12월 18일자의 ‘聞一知十’에서 시작되어 1910년 8월 17일자에 이르기까지≪대한매일신보≫의 고정란에 거의 빠짐없이 게재되었는데, 긴 시간에 걸친 게재로 말미암아 시기에 따라 그 형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一國을 헌動니 內閣大臣의 權利로다
나라權利 다팔아셔 自己地位 買得니
獨專其利 됴흘시고
二千萬衆 우리同胞 生命財産 엇지나
不顧生靈 져官吏들 貪虐에만 從事니
浚民膏澤 됴흘시고
三百四十 餘郡中에 남은土地 얼마런고
六里靑山 져긔잇다 六國山川 指點니
稍蚤食之 됴흘시고
六大部洲 列强國에 大韓獨立 公布터니
露日講和 된然後에 保護國이 웬말인가
弱肉强食 됴흘시고
이 작품은≪대한매일신보≫1907년 12월 18일자에 게재된 ‘문일지십’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회등’ 가사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 위에 인용한 대목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숫자 노래의 영향을 받아 각 연의 첫글자로 1∼10의 숫자를 사용하면서 작품 전편을 10련으로 구성하였다. 위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등’ 가사는 부정적인 인물 군상들을 비판·매도·풍자한 작품으로 4음 4보격, 분연체, 후렴구를 형태상의 특징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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