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2. 근대 예술의 발전
  • 3) 연극과 영화

3) 연극과 영화

 개화기에 접어 들어서는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분야가 바뀌는 진통을 겪었던 만큼 문화예술계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다만 문화예술분야 중에서도 연극만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전환점을 만들만큼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개화기의 특징은 아무래도 서구문물의 유입에 따른 기존양식의 변혁이라 볼 때, 연극장르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이 19세기 이전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어쨌든 정치·사회·문화에 한걸음 뒤처져서나마 연극도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과거에 없었던 屋內劇場이 생겨난 것에서부터 판소리가 分唱되어 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발생시켰다든가 활동사진 즉 映畵가 들어오고 중국의 京劇이나 일본의 신파극이 들어온 것 등도 큰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신체시가 등장하고 신소설이 유행한 문학장르와 비교해 볼 때 연극은 고작 판소리 형태의 변형이라 할 창극 몇 편이 나타난 정도이므로 무대예술의 변화는 그만큼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곧 창조자들이라 할 극작가·연출가·배우 등의 감각과 의식이 닫혀 있었고 서구문화에 둔감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연극장르의 낙후성은 결국 문학이나 미술 등 타분야의 빠른 발전을 뒤쫓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고 오늘날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어 연극장르도 시대상황의 변화에 발맞춰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그 첫번째 변화가 과거에 없던 옥내극장의 개설이다. 농경사회가 오래 지속된 우리 나라에서는 모든 공연예술이 넓은 뜨락이나 마당, 산비탈, 들판 등에서 연희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부실하나마 옥내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령 阿峴무동연희장을 필두(1899)로 해서 용산무동연희장, 協律社, 광무대, 연흥사, 장안사, 단성사 등 7, 8개 극장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무렵 서양인들이 활동사진 즉, 영화라는 것을 들여와 상업목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가 1903년 6월경 동대문 전기회사 器械廠에서였다. 이것이 한국영화의 효시가 된다. 당초 한성전기회사가 시행하고 있던 電車사업의 도급자였던 미국인 콜브란(Collbran)과 보스트위크(Bostwick)가 상업목적으로 활동사진을 들여 왔고 신기한 영화를 처음 접한 시민들이 몰려들어 하룻밤에 천명 이상씩 관람했다. 그로부터 서울의 몇몇 극장에서 다투어 영화상영을 했고 이후 영화가 대중적 오락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극장은 유일한 관립극장인 협률사였다. 궁중의 혼상제례와 종묘사직의 춘추향제 담당의 내부소관 奉常寺 건물 일부를 개조한 협률사는 야주현에 있었고 5백석 정도의 중형극장이었다. 군악대 운영을 위해서 개설한 협률사는 전국에서 명인, 명창, 무희, 무동 1백 70여 명을 불러 모아 전속단체를 구성했고 각종 연희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급료를 받으면서 이들이 공연한 레파토리는 판소리, 민속무용, 재담 등 전통적인 연희물이었고 영화도 상영했다. 그런데 협률사는 많은 관중을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론, 특히 지식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요지는 대체로 세가지였는데, 첫째 관인이 내탕금으로 세운 협률사가 극장수입으로 사복을 채운다는 것, 둘째 창부·기녀의 풍악으로 청소년들의 심지가 동요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세월을 허송한다는 것, 셋째 황실극장이라면서 궁중영업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등이었다. 결국 당시의 고루한 지식층의 벽에 부딪쳐 협률사는 1906년 극장으로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협률사 건물은 관인구락부라는 사교장소로 바뀌고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등 사설극장들만 공연장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들 사설극장들 역시 레파토리는 판소리, 민속무용, 재담, 풍물 그리고 영화였고 배우들은 명창, 기생, 악사들이었다.

 무대예술의 경우는 서양문물이 밀려오던 당대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매사 ‘新’이라는 글자가 붙던 시대였음에도 연희만은 전통적인 것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연극인들이 서양연극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04년 청나라의 고전극 京劇團이 서울에 들어와서 경극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외래 연극감상이었다. 그 외에 활동사진이라는 것을 접할 수가 있었지만 대부분 서양문물을 찍은 다큐멘타리였으며 간혹 우리 나라 황태자의 근황을 찍은 필름을 구경하는 정도였다. 관객층은 상류층과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른바 중류층이라는 유식층은 연희를 멀리하면서 비판세력으로 머물렀던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중산층이 무대예술의 주 관객층이 되어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가령 당시 보도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단성사니 협률사가 설치된 후로 豪華子 富貴客들이 매야 該社에 追逐하여 蕩敗家産者가 근일 이래로 우심하다더라”484)≪大韓每日申報≫, 1908년 2월 18일.는 기사가 보이는가 하면 “내부대신 宋秉畯, 농상공부대신 趙重應 양씨와 각부 차관 일동과 통감부 고등관 수십명이 재작일 하오 7시에 신문내 圓覺社에 전왕하여 제종 연희를 일체 관람한 후에 명월관에 회동하야 진심 환락하고 작일 오전 3시경 제 각자 散去 하얏더라”485)≪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18일.는 기사도 나와 있다. 이처럼 고관대작과 그 자제들이 극장의 고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총리대신 이하 각부 대신의 부인들이 연합하여 재작야 원각사에 전왕하여 제반 연희를 관람하얏다더라”486)≪皇城新聞≫, 1908년 10월 23일.는 기사로 보아서 귀족의 부인까지 연극의 고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관대작들 중에서도 내부대신 송병준을 위시하여 永宣君 李埈鎔, 궁내부대신 閔丙奭·尹德榮·李址鎔·趙民熙·閔泳徽 등이 고정관객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의 연예인이라 할 기생들을 대동하고 관극하는 등 추태도 연출했다. 고관대작들의 이러한 스캔들 때문에 지식층의 연희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분위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연희를 탄압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개화기의 연극관객층이 귀족층과 하류층으로 구성된 것은 오늘날 세계연극의 관객층이 중상층에 기반을 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객층 구성이 끝내 우리 연극관객층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는 원인의 한 가지였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지식층은 항상 연극을 경원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시 협률사를 비판하여 문을 닫게 한 것이라든가 그 후의 지속된 극장공연에 대한 비판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지식인들은 특히 연희내용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었는데≪황성신문≫의 다음과 같은 사설은 하나의 단적인 예이다. 즉 그 사설에서 “문명 각국의 연희장은 개기 세인의 선악을 권징하며 국민의 충의를 감발하기 위하여 歌以諷詠하며 舞以形容하나니 연희장이 역 일교육의미를 寓하는 地어늘 금 소위 협률사와 단성사와 연흥사는 적족히 인심을 蕩逸케 하고 풍속을 淫靡케 할지니 기위 손해가…격절한 언사로 일장 연설하였는데 만좌제씨가 莫不嘆賀하였다”487)≪皇城新聞≫, 1908년 5월 5일.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식자층이≪황성신문≫등을 통해 비판한 것은 판소리, 민요, 민속무용, 재담 등 전통연희였다. 신문논조를 좀더 분석해 보면 서양의 경우 연극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우리는 판소리, 민속무용, 탈춤 등 사회성없는 작품으로 무뢰자제의 심지만을 방탕케 함으로써 장차 망국에까지 이르게 할지 모른다고 개탄하였다. 식자들은 우리의 전통공연예술을 淫詞로만 인식하고 배격한 것이다. 그들은 예술의 두 가지 기능, 즉 교화와 오락 가운데 교화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계백장군이라든가 성충·박제상·최영장군·윤관·정몽주 등 충신열사들만을 극화하라고 주문까지 했던 것이다. 일종의 새마을극을 주창한 것이다.

 이러한 식자층의 전통연희 비판은 일본경찰의 한국전통예술 탄압의 구실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을사조약과 함께 이 땅에 경시청과 헌병사령부를 설치하고 1907년부터 우리 문화를 탄압하였다. 첫번째로 위생경찰규칙을 통해 공연시간을 오후 12시까지로 제한하였다. 당시에는 전통연희 공연방식대로 보통 새벽 두세시까지 공연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번째 조치는 극본검열이었다. 즉 1909년 7월부터 경시청이 각 연극장의 연희 원료를 취조하여 인허한 후 시행케한 것이다.488)≪大韓民報≫, 1909년 7월 9일. 명목은 연희내용이 “음담패설에 불과하여 남녀의 불미한 행위가 層生”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극장에는 경찰이 수시로 상주하며 감시하였다. 세번째 조치는 관객 40명 이상일 때만 공연할 수 있도록 하는 극장규칙의 강화였다. 그리하여 연흥사 같은 극장은 공연중 관객 40명이 차지 않아 공연을 중지당하고 관객에게 요금을 돌려주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489)≪大韓民報≫, 1909년 7월 28일. 그리고 네번째로 단체의 강제해산과 극장의 폐관조치였다.≪대한민보≫, 1909년 7월 28일자 “경시청에서 각 연극장 취체규칙을 제정하는데 경성내 1, 2처만 존재케 하고 나머지는 해산케 했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는 경시청에서 각 극장 책임자들을 초치하여 연극을 못하도록 협박까지 하였다. 한국연희는 음탕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1910년 5월 31일자≪황성신문≫에 “경시청에서는 일작 각 연희장 총무 등을 초치하여 풍속에 방해되는 연예를 일체 정지하도록 說諭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본격적인 연극탄압이 시작되면서 각 극장에는 경시청과 헌병사령부 두 곳에서 감시관을 파견했는데 그것은 곧 임석경관과 헌병사령부의 고등탐정이었다. “근일 각 연극장 상등석에는 각 탐정자 등이 무료로 10여 명 이상씩 배석하여 무단히 시비를 거는 폐단이 있는 고로 그 극장주의 곤란이 막심하더라”490)≪大韓民報≫, 1910년 8월 11일.는 기사는 고등탐정의 행패가 작심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고등탐정들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경시청의 한국인과 헌병사령부의 탐정간 쟁투가 극장 안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우리 무대예술 탄압은 합방 전부터 시작되었고 극본 검열제도와 공연감시의 임석경관제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유전통연희가 위축되었고 식자층의 전통공연예술 폄하로 인해서 발전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연희자들은 중단없이 공연활동을 벌였다. 연희자들은 대체로 판소리 명창, 민요와 무용을 하는 기생·악사·무동·재담꾼 등으로서 고유전통연희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협률사에 속했으나 그 극장이 폐관됨으로써 연흥사·광무대 등 사설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 7월 협률사가 朴晶東·金相天·李人稙 등 3인에 의해서 원각사로 개칭되어 사설극장으로 운영되면서 상당수 연희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즉 남녀 명창·무희·무동·악사 등 70여 명이 원각사전속 급료를 받고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국창 이동백을 단장으로 한 원각사 전속연희단은 개관하자마자<춘향전>등 전래 판소리 5마당과 민속무용·풍물 등을 공연했다.

 그런데 관중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사회가 급변하는데 비해 극장무대에 올려지는 공연물은 한결같이 옛것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연희자들이 시대추세에 맟추는 연희를 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이동백·강요환 등 몇몇 중견급 명창들이 청나라에서 들어온 경극이라는 중국 전통극을 구경하게 되었다. 분명히 경극은 이동백 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경극은 우선 등장인물도 다양하고 그 독특한 분장과 연기양식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나라와<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약을 맺은 것은 1882년이었다. 그로부터 서울·부산·원산 등지에 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청계천 2가는 청국상인가가 되기까지 했다. 7천여 명의 청인들은 오락이 필요했고 본국에 예술단을 요청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처음에는 곰놀이 등 잡희단체가 들어와 서울에서 놀이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 청인들은 1904년 청계천 2가에 전용극장격인 淸國館을 개설했다. 이후 청국으로부터 경극단이 자주 들어와 공연을 하였으며 청국관 외에도 장안사 등 사설극장에서도 이따금 큰 공연을 가졌다. 당시 신문에 “청인연극, 근일 청국창부 80여 명이 거액의 자금을 판출하야 해 연극제구를 준비하고 동구내 장안사에서 일간 개장한다더라”491)≪大韓每日申報≫, 1909년 4월 16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경극은 그 다채로운 극적 구조와 음악적 발성 때문에 우리 나라 명창들에게 공감을 주고 창극의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판소리를 분창하여 창극을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판소리 자체가 1인 다역의 극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만 나누어 부르고 무대뒤에 간단한 배경화만 걸어 놓으면 그대로 창극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원각사나 연흥사 같은 극장에서는 처음 남창·여창으로만 구분한 후 간단한 백포장의 무대장치로 공연하였다. 초기에<춘향가>정도를 창극화한 명창들은 조금씩 발전시켜 후에 토끼나 자라 같은 獸類魚族의 분장까지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원각사 연희자들은 개화기의 외세 물결을 좇아 새로운 연극을 시도하였으나 판소리 분창의 창극개발에 머물렀다. 당시 연희자들에게는 그것만도 극히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들은<춘향가>등 판소리 5마당을 창극으로 만드는 등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곧 레퍼터리의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배비장전>·<장화홍련전>같은 고전소설을 극화하여 무대에 올리고 이들 창극을 신연극이라 선전하며 공연했다. 그러자 관객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신연극이라면서 구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당시 신문에 보면 “원각사에서 각 신문에 광고로 게포하되 일체 구연극을 개량하고 충효의 열 등 신연극을 설행한다 하므로 재작야에 관광자가 다수 來集하였더니 급기 임장에는 춘향가 일장 후에 즉시 閉社함에 내객 중 1인이 大聲詰駁曰 광고에는 신연극을 설한다 하고 춘향가만 창하니 是는 騙財的으로 欺人함이라 함에 일반 관광자가 개전 후 호응하야 원각사의 불신무미를 힐책하고 자금 이후는 원각사에 再到치 않기로 발서하야 일장 풍도를 大起하였다더라”492)≪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일.로 나와 있다. 신연극을 한다고 광고하여 관객을 불러모아 놓고서 창극을 한 것은 기만행위가 아니냐는 힐책이었다. 사실 원각사측에서는 고의적으로 관객을 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각사 연희자들과 관중과의 신연극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을 뿐이다.

 즉 원각사 연희자들은 창극을 신연극이라 보았고 관객은 창이 주가 되는 재래의 판소리 분창화는 신연극으로 볼 수 없다는 엇갈림이었다. 그러나 원각사 공연은 지속되었다. 극장이 있고 전속단원까지 있어서 비용이 계속 나가는데 공연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각사측에서는 창작창극으로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해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신소설 작가 이인직의 소설<은세계>를 극화해서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관중의 반응은 대단치 못했던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이 과연 우리 나라 新劇의 출발이 되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근자까지 그 작품을 기점으로 신극사를 정리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 작품을 창극으로 규정함으로써 신극의 기점을 1911년 革新團(林聖九 주도)의 창립공연부터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원각사는「은세계」외에도 한두 편의 창작창극을 무대에 올린것 같다. 물론 그 동안 공연했던 재래의 레퍼토리는 배제하지 않았다.

 이 시기 또 하나 주목되는 사항은 일본인들이 자기들만의 극장을 세워 본국의 극단을 초빙하여 자주 공연한 점이라 하겠다. 물론 일본인들이 오락물을 서울에 들여 오기 시작한 것은 1902년경부터였다. 일본상인들이 왕래하며 연예인들도 따라온 것이다. 일인들이 극장까지 설립하여 자기들의 연극을 공연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였다. 즉 을사조약을 전후해 일인들이 서울에만도 1만 6천여 명이 거주했고 1910년도에는 3만 4천여 명이나 거주하였다. 서울인구가 고작 20만 명이었음에 비추어 일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인수가 늘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그들이 거주하던 을지로·충무로·남대문 밖 등에 극장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歌舞伎座 경성좌·壽座·어성좌 등의 극장들이다.

 극장 개설과 함께 동경·경도·대판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파극단들이 공연하기 시작했다. 가령 이토우 후미오 이치자(伊東文夫一座), 미나미 이치자(南一座), 고토우 로우스케 이치자(後藤良介一座), 아니자와 이치자(愛澤一座) 등 신파극단이 바로 1908∼1910년 사이에 서울에서 공연한 단체들이다. 이들은 신파극<금색야차>·<불여귀>·<피스톨강도 시미즈 조우키치(청수정길)>등과 셰익스피어의<햄릿>·<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하고 갔다.

 이 때 이토우 후미오(伊東文夫) 등 일본의 저명한 신파극배우들이 내한하여 신파의 진미를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 신파극단들의 내한 공연은 초청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순회공연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당시 일인들이 서울에 극장을 설립하고 본국으로부터 신파극단을 초청하여 공연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신파극의 싹이 틀 수 있었다. 일본인 극장에서 신파극을 배운 林聖九가 1911년 12월 최초로 신파극단 혁신단을 조직하여 연극을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1907년경부터 극장을 설립한 것이 한국신극의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개항으로부터 1909년까지의 공연예술계는 격동의 시대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가 연예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柳敏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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