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1) 신문 발간의 배경

1) 신문 발간의 배경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가장 구체적이면서 상징적인 결실은 신문의 발간이었다. 신문은 외국의 문물을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여 자신을 수호하는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한 현대사의 중심기관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정부기구인 博文局에서 발간한≪漢城旬報≫와≪漢城周報≫이다. 전자는 1883년(고종 20) 10월 31일에 창간되었다가 이듬해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었고, 그 뒤를 이은 후자는 1886년 1월 25일부터 발행되기 시작하였는데 1888년 7월경에 폐간되었다.

열강 여러 나라들과의 접촉을 통해 개화가 시급함을 깨달은 조선정부와 지도계층은 국민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가장 시급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신문의 발간이라고 판단하여≪한성순보≫를 창간하였다. 신문 발간을 전후하여 우리 나라는 열강 여러 나라들과 처음으로 수호조약을 맺기 시작하였다. 1876년 일본과 맺은 통상수호조약을 시초로 미국(1882), 영국(1883), 독일(1883), 그리고 러시아(1884)와 같은 서양열강들과 국교를 맺었다. 이러한 대외교섭의 과정에서 낙후한 국력을 신장해야겠다는 자각이 싹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문의 존재와 그 역할이 처음으로 소개되던 초기 단계에는 중국과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이 쓴 견문기에 신문이 개화에 긴요한 기관임을 기술한 내용이 담겨 있다. 1873년과 1874년 두 차례에 걸쳐 冬至使節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한 姜瑋가 쓴≪北游談草≫와≪北游續草≫를 보면 북경의 관리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신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 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우리 나라 관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과 일본에 갔다 오면서 신문에 대해 좀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876년 1월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온 金綺秀는 귀국 후에 쓴≪日東記遊≫에다 신문·종이·인쇄·사진 등 신문 또는 서적의 인쇄와 관련되는 견문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였다.001)金綺秀,<日東記遊>(≪修信使記錄≫:한국사료총서 9, 국사편찬위원회, 1958), 66·78∼80쪽.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던 嚴世永이 일본의 국정을 보고하는 가운데 “…원로원을 두고 백성들에게 귀 기울이며 신문지를 만들어 위로는 점차 군민이 서로 함께 다스리는 데까지 이르렀고, 조야의 논의도 가히 한 곳으로 귀일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002)嚴世永,≪見聞事件≫(서울대 奎章閣도서, 분류기호 1311-4-4). 이와 같이 조선정부의 관리들은 서양열강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국민의 계몽과 개화를 위해서는 신문이 매우 효과적이고 필요한 존재임을 알리고 있다.

≪한성순보≫와≪한성주보≫는 이 같은 배경에서 발간되었다. 신문 발간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세계 정세를 알리는 한편 선진국가의 정치·경제 및 문화제도를 소개하고 과학지식을 보급시키어 결국은 이 나라를 문명개화의 단계로 이끌어 보기 위한” 것이었다.003)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관한 一考察>(≪韓國開化史硏究≫, 일조각, 1974), 6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