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2)≪한성순보≫의 창간
  • (3) 필화와 중국과의 관계

(3) 필화와 중국과의 관계

순보는 준비과정과 기계 구입을 비롯하여 실제 제작에도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은 상대적으로 소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중국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순보가 중국에 불리한 기사를 보도했을 때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884년 4월 13일 중국은 순보 제10호(1월 30일자)<국내사보>란에 게재된<華兵犯罪>라는 기사와 제11호(2월 7일)<華兵懲辦>이라는 기사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문제된 기사는 종로 광통교 옆에 있는 약방에서 중국병정이 살인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조선정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중국군에 관해서 근거 없는 기사를 실었다고 항의한 것이다.

조선정부는 4월 19일자로 회답을 보냈다. 내용은 박문국에 기사 게재의 전말을 물어 본 결과 범인이 중국인이라는 증거가 확실해서 기사를 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문제가 된 기사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요지의 회답을 보내면서도 중국에 대해 떳떳한 태도로 나오지는 못하였다. 정부기관인 박문국에서 떠도는 소문에만 의거하여 기사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잘못된 일이며, 박문국원들은 이를 자책하여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덧붙인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선으로서는 증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사를 실은 것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측은 이틀 뒤인 4월 21일에 다시 조회하기를 조선측의 회답에서 단지 박문국 순보의 착오라고만 말했을 뿐으로 이 안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와, 관련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데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였다. 또한 중국측은 범인 체포를 위해서 현상금을 걸었으며, 중국상인들의 야간통행을 금지하였으니 이를 널리 알리라고 요구하였다.

기사가 나간 지 2개월이 지난 뒤에야 말썽이 일어난 이 필화사건은 중국측의 4월 21일자 조회가 마지막이었고, 조선정부는 중국의 요구에 따라 종로거리와 성문 각 곳에 범인 체포를 위한 고시를 널리 게시했다는 사실을 5월 3일자로 중국측에 알리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016)≪舊韓國外交文書≫8권, 淸案 1(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70쪽 이하.
≪統署日記≫, 고종 21년 3월 20일 이하 참조.
이 필화사건은 순보에 대한 중국의 불편한 시각을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정부의 미묘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발단부터 다시 살펴보면 중국은 사건을 보도한 후 2개월이 지난 뒤에야 공식적으로 문제삼으면서도 “중국과 조선은 원래 한 나라처럼 지내 왔으므로 소원한 다른 나라의 예를 援用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중국은 조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순보가 발행되고 있던 때에는 벌써 양국관계가 상당히 소원해져 있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