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5) 개화와 국민교화의 기능

5) 개화와 국민교화의 기능

순보와 주보를 발행하던 당시 사람들은 서양이나 중국 또는 일본의 신문을 단순히 모방하여 신문을 발행하지는 않았다. 신문이 발행되기 전에도 우리의 정치제도와 정치사상으로 신문이 수행해야 할 기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제도를 담을 수 있는 서양식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신문이라는 그릇을 도입하고 이를 근대식으로 구현하였을 뿐이라고 보았다.

신문이 국민의 견문을 넓혀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한다는 생각은 그 후의 민간신문에도 계승되었고, 순보와 주보를 제작하던 사람들은 신문이 폐간된 뒤에 정부의 중책을 맡아 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초기의 제작진인 김만식·장 박·남정철·여규형·유길준 등이 모두 대신급의 중책을 맡았고, 유길준은 후에 정부에서 서재필의≪독립신문≫발행을 지원하도록 도와 주었다. 주보의 기자였던 吳世昌은 한말에는≪萬歲報≫(1906. 6. 17)와≪大韓民報≫(1909. 6. 2)의 사장을 지냈고, 광복 후에는≪서울신문≫의 초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한글 사용도 이미 주보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순보와 주보의 발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문하생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간여했던 사실 때문에 이들의 역할을 사실 이상으로 과대평가 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신문 발간의 중심 인물들은 여규형·고영철 등 박문국의 관리들이었다.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신문 발간에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었지만, 순보의 뉴스원이나 그 내용은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작과 관련된 인물들을 보더라도 주보를 발간할 때에 통리아문의 독판이었던 김윤식은 영선사로 중국에 갔다 오면서 신문 발간의 자료로 쓸 서적과 신문 등을 가져 왔으며, 영선사 일행이었던 고영철도 신문 발간에 참여하였다.

제작진들은 모두 한학에 능통했으므로 서양신문을 직접 읽을 수는 없었지만 중국에서 발간된 신문을 통하여 서양사정을 소개했던 것이다. 인용된 뉴스원을 보더라도 일본신문보다는 중국의 신문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순보와 주보를 정부기구에서 발간했다는 이유로 관보로 생각하고 최초의 신문을≪독립신문≫부터라고 보려는 사람도 있으나, 초창기의 신문은 정부가 발간하는 경우가 많으며, 정부가 발행하였더라도 순보와 주보의 편집내용을 보면 관보라는 개념과는 크게 다르다. 순보와 주보는 민간에서 발행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던 당시에 정부가 앞장서서 만든 신문이었으며, 이는 기사의 성격과 내용으로 보아 명백하다.

≪한성주보≫가 폐간된 뒤로는 신문 없는 시대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1896년 4월 7일 본격적인 민간신문인≪독립신문≫이 창간되어 오늘까지 한국신문의 전통은 끊이지 않고 있다.≪독립신문≫은 순보와는 달리 한글 전용으로 제작되었고 민간신문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에서 서재필의 신문 발간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성순보와 주보를 발간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신문이 개화와 국민교육에 미치는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의 신문 발간을 적극 지원한 사람은 내부대신이 되어 있던 유길준이었다. 유길준은 순보 창간작업을 제일 먼저 시작했던 사람이었으니 신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순보와 주보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독립신문도 순보와 주보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하고 그 발간 정신이 계승되어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鄭晋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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