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1) 서재필의 망명과 귀국

(1) 서재필의 망명과 귀국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음력 1863년 11월 28일)에 태어나서 1882년 음력 3월에 실시된 과거(別試 文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이듬해 5월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경영하는 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를 배운 뒤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884년 7월 말에 귀국하여 士官長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020)李光麟,<徐載弼의 開化思想>(≪韓國開化思想硏究≫, 一潮閣, 1979), 93∼149쪽 참조.

서재필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망명객의 처지가 되어 미국에 체류하면서 1892년에는 워싱턴시에 있는 콜롬비안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을 졸업하여 의사자격을 취득하였다. 1890년 6월에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국내의 정치정세는 바뀌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과 함께 친일내각이 성립되면서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던 망명객들에게도 사면령이 내린 것이다. 이제 서재필에게도 귀국의 길이 열렸다.

서재필은 1895년 12월 말에 귀국하였다. 그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민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귀국 직후 1896년 3월에 발행된≪코리안 리포지토리≫에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은 정부가 하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021)Philip Jaisohn, What Korea Needs Most, The Korean Repository, Mar., 1896, pp. 108∼110. 그는 11월 30일에 발간된≪대죠션독립협회회보≫창간호에 게재한<공긔>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정부와 국민의 상호 이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 조선정부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0년간 월봉 300원의 보수를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서재필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정부의 월급을 받는 중추원 고문직보다는≪독립신문≫의 발행이었다. 그는 또한 독립협회의 창립과 그 운영, 독립문의 건립, 그리고 배재학당에서의 강의 등에도 정열적으로 헌신하였다.022)李光麟,<徐載弼의 開化思想>(앞의 책, 一潮閣, 1979), 111∼136쪽.
―――,<徐載弼의 독립신문 刊行에 대하여>(≪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79), 152∼198쪽.
愼鏞厦,<독립신문의 創刊과 그 啓蒙的 役割>(≪獨立協會硏究≫, 一潮閣, 1976), 1∼80쪽.

조선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였다. 신문사 설립자금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별도로 지급하여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지원 받은 금액은 모두 4,400원이었다.023)愼鏞廈, 위의 책, 9∼17쪽.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정부로부터 매월 300원의 급료를 받고 있었으므로 생계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이리하여 서재필은 귀국한 지 3개월 만인 1896년 4월 7일에≪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당시의 교통·인쇄시설·신문제작에 필요한 인적 자원 등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서는 매우 짧은 시일에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이처럼 단시일에 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재정지원과, 초기에는 감리교 계통의 인쇄소인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에서 신문을 인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 서재필의 신문 발행을 지원한 것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 발행을 지원한 또 다른 목적은 일본인이 발행하고 있던≪漢城新報≫와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한성신보≫는≪독립신문≫보다 1년 전인 1895년 2월에 창간되어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조로 발행되다가, 을미사변 때에는 명성황후 시해의 비밀근거지로도 활용되었고,≪독립신문≫이 창간된 직후 4월 17일자 지면에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웃는 내용의<동요>라는 것을 실어 국민들을 격분케 하였다. 조선정부에서 이 동요를 문제삼아 일본에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024)≪舊韓國外交文書≫3권, 日案 3(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1967), 402쪽.
≪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6권,<外衙門日記> 105·132쪽.
國史編纂委員會 소장,≪駐韓日本公使館記錄≫, 1896년<機密本省往>280, 195∼219쪽.

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독립신문≫의 창간자금을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사의 사옥을 제공하고 우송요금의 할인과 취재활동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특혜를 주었다.≪독립신문≫은 이와 같이 서재필의 생각과 조선정부의 인식이 일치하였으며025)愼鏞廈, 앞의 책, 40∼45쪽. 서재필의 뛰어난 식견과 개화에 대한 열망과 추진력으로 창간된 것이다. 정부는 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제작과 경영에 관해서는 간여하지 않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