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6) 윤치호와 아펜젤러의 경영

(6) 윤치호와 아펜젤러의 경영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에게≪독립신문≫의 편집과 경영을 위임하였다.029)이만열,≪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연세대 출판부, 1985), 393∼395쪽, 1898년 8월 17일 아펜젤러가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尹致昊를 주필로 임명하여 경영 전반을 맡도록 하였다.

윤치호는 1881년 1월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동경에 갔다가 그 곳의 同人舍에 입학하여 영어와 일어를 배웠고, 그 후 중국 상해의 中西書院에서 5년간 공부한 다음에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Vanderbilt)와 에모리(Emory)대학에 유학하고 온 지식인이었다. 그는 갑오경장·독립협회운동·애국계몽운동과 같은 개화기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깊이 간여하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학부협판·외부협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1897년 후반부터는 독립협회에 적극 가담하여 그 회장을 맡는 등 정치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하였던 역사의 참여자이자 관찰자이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경영을 맡은 지 한 달 반 후인 7월 1일부터 그 때까지 격일간으로 주 3회 발행이었던≪독립신문≫을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해 12월 25일 고종이 11개조의 민회 금압령을 내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혁파하도록 명하자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덕원(元山)감리 겸 부윤으로 임명되어 서울을 떠나면서≪독립신문≫에서도 손을 떼고 말았다. 이리하여 1899년 1월부터 독립신문사는 아펜젤러가 맡아 운영하였다.

≪독립신문≫에는 서재필과 윤치호 외에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 가운데는 독립협회의 소장 신진파로 활약하여 중추원 議官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던 孫承鏞이 있다. 한글학자 周時經(본명은 尙鎬)도≪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주시경은 서재필이≪독립신문≫을 창간하였을 때에는 배재학당의 학생이면서≪독립신문≫의 ‘회계사무 겸 校補’의 일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 후 회계의 일은 그만두고 ‘총무’가 되었다가 1898년 봄부터 9월까지는 ‘총무 겸 교보’의 일을 맡았다.030)金敏洙,≪周時經 硏究≫(탑출판사, 1977), 35쪽에 실린 주시경의 이력서와≪나라사랑≫4,<한힌샘 주시경선생 특집호>(1971) 참조. 이 기간 동안 그는 독립신문사 안에 國文同式會를 두었다 하며,≪독립신문≫에 2편의<국문론>을 발표하였다. 1897년 4월 22일과 24일자, 그리고 이 해 9월 25일과 28일자 1면 논설란에 실린 글이 그것이다.

아펜젤러는 우리 나라에 온 최초의 선교사이며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인 사람이다. 그는 27세였던 1885년에 한국에 와서 이듬해 6월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88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서양식 교육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031)이만열, 앞의 책, 511쪽 이하 年譜 참조. 1890년 1월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대한성교서회 회장이 되었고, 1895년부터는 영문 월간지≪코리안 리포지토리≫의 편집인도 맡았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독립신문≫의 사장은 아펜젤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윤치호가 운영하다가 1899년 1월 윤치호가 덕원감리로 떠난 뒤부터는 아펜젤러가 신문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해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버얼리(H. Emberley)에게 신문사를 인계하였다.

엠버얼리는 1898년 6월부터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 감독으로 있었던 사람인데, 신문을 운영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 밖에 영문판 제작에는 호머 헐버트(Homer H. Hulbert)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의 동생인 아처 헐버트(Archer B. Hulbert)도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는 영문판 제작을 도왔다.032)C. N. Weems, Hulbert's History of Korea, Vol. 1, London;Loutledge & Kegan Paul, 1961, p. ED 34.

그런데 정부는 1899년 7월 14일≪독립신문≫사옥의 반환을 요구하였다.≪독립신문≫을 창간할 때에 서재필에게 신문사의 사옥으로 사용하도록 정부 소유의 건물을 제공하였는데 이를 환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사옥의 반환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정부와 미국에 있는 서재필 사이의 교섭을 주선하였다. 이리하여 1899년 12월 4일자로 정부가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여≪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하였다. 이 날부터≪독립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독립신문사를 매수한 뒤에 대한제국정부는 그 시설로 신문 발간을 계속하기 위해 아일랜드 출신 영국인 오세아(吾時, John O’Shea)에게 일을 맡겼다. 궁내부는 정간중이었던≪商務總報≫의 기계와 활자까지 오세아에게 인계하였으나, 결국 신문은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오세아는 재동에 있던 외아문 건물에 거주하면서 영문판만 주 2회씩 발간하겠다면서 영어에 능통한 내외국인을 모집한다고도 했지만 신문은 발행되지 못하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되었으므로 43개월간 간행된 셈이다. 이 신문이 언론의 발달과 사회의 개혁에 미친 영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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