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4) 일간지 ≪일신문≫
  • (2) 일간신문으로 발전

(2) 일간신문으로 발전

협성회가≪협셩회회보≫를 일간으로 고쳐≪일신문≫을 창간한 것은 혁신적인 쾌사였다. 당시는 아직≪독립신문≫조차 격일간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으므로≪일신문≫은 우리 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일간신문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협셩회회보≫와≪일신문≫을 만든 사람들은 당연히 협성회의 간부들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제작을 주도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협성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었으므로 배재학당 학생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특별히 신문제작을 담당한 ‘記載員’, 즉 기자가 따로 필요했을 것이다.

≪협셩회회보≫에 기명 논설을 썼던 사람들이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梁弘黙·李承晩·崔廷植·柳永錫 등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으로 이 신문제작에 참여하였는데 사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승만은≪협셩회회보≫를 발전시켜≪일신문≫을 발행하던 때에는 협성회의 회장이 되어≪일신문≫의 사장으로 되었으나 사내 분규로 말미암아 유영석·최정식과 함께 7월 초에 물러나 8월 10일에 창간되는≪뎨국신문≫에 참여하였다.

≪협셩회회보≫2월 19일자(제8호)<회즁잡보>에는 협성회 제5차 임원의 명단과 함께 “회보쟝 양홍묵씨는 인임하였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양홍묵은 이 신문이 창간될 때에 ‘회보장’으로서 신문제작을 책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홍묵은 그 후≪일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사장이 되어 이 신문을 이끌어 나갔고, 이 해 가을부터 1902년까지 배재학당의 선생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그는 이승만과 함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중추원 의관으로 선출되었으며, 후에 의정부 참서관, 김해군수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협셩회회보≫가≪일신문≫으로 발전한 후에는 협성회와는 별도의 신문사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경영문제와 관련한 사내 분규가 일어나 제작진의 변동이 있었다.≪일신문≫이 창간된 3일 후인 4월 12일자(제3호)에는 “이 신문 샤쟝은 본회 회쟝이 예겸할줄노 작뎡되엿더라” 하여 협성회 회장이≪일신문≫의 ‘사장’을 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40일 후인 5월 21일자(제37호)에 의하면 협성회 임원을 개선하여 회장에 이승만, 부회장으로는 양홍묵이 선출되었는데, 같은 날짜 4면에는 ‘편집인 최졍식, 져슐인 리승만, 발행겸 인쇄인 류영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편집인 최정식은 협성회의 정회원이 아니고 찬성원이었는데(≪협셩회회보≫2월 26일자<회즁잡보>) 곧 사내 분규의 장본인으로 몰려 신문사를 떠나게 되고, 얼마 후에는 설화사건으로 구속되어 그보다 뒤에 구속된 이승만과 탈옥을 기도하다 사형당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