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3) 국민계몽과 애국심의 고취

(3) 국민계몽과 애국심의 고취

한말 신문들은 국민계몽을 그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국가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치에 놓이게 되자, 국민계몽은 국가의 부국강병이라는 지향보다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라는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따라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계몽이 민족언론들의 중요한 관심이었다. 1905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것이 신문이었던 만큼, 신문은 교육개발과 실업발전을 내세우며 실력양성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국민계몽을 위하여 신문들은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신교육운동을 적극 지지하였고, 지원하였다.≪대한매일신보≫의 경우,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논설의 50% 이상이 국내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이 교육문제였다고 한다.072)유재천,<大韓每日申報의 민족주의적 성격>(≪한국언론과 이데올로기≫, 文學과 知性社, 1990), 101∼103쪽. 이것은≪대한매일신보≫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당시 신문들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실제 신문들은 국력이 교육의 발달 정도에 좌우되며,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시급한 일을 교육으로 인식하고 있었다.073)아래와 같은 논설에서 이러한 견해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성신문≫, 1905년 3월 8일, 논설<國力振興在敎育>.
≪대한매일신보≫, 1906년 1월 6·7일, 논설<務望興學>.
≪공립신보≫, 1907년 12월 20일, 논설<보통교육이 문명의 근본>.
≪황성신문≫은 1906년 3월 27일자 논설<對申觀察興學訓令警告實行>에서 “現今我韓之急務 在開發民智而己오 其開發民智之方은 在興學校·讀新聞而己니”라고 한 바 있었다. 모두 교육을 당시 가장 시급한 일로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문에서는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회들의 창립을 지지하고, 교육에 적극적인 인물과 단체를 찬양하였다.074)≪황성신문≫기사에서 몇 건의 예를 들어보면,<聞峴山學校作興賀襄陽人士>(1906. 10. 4)·<賀長薰學校長李根培氏>(10. 18)·<牛山學校의 有志人士>(1. 21)·<畿湖學會의 三個人>(1908. 10. 15)·<李禹珪·金容鎭兩氏의 高義>(10. 22·23)·<偉哉三氏의 高義>(10. 29)·<金容鎭氏를 爲야 又一拜>(1909. 8. 21) 등 많이 나타난다. 신문에 별도로 교육관계의 기사만을 소개하는 고정란을 두기까지 하였던 것이다.075)한말 신문과 잡지들의 교육관련 기사만을 정리한 것으로 李吉相 외 편,≪韓國敎育史料集成≫ I-IX(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1994)가 참고된다. 반대로 신교육에 관심이 적던 지방에 대해서는 신교육의 실천을 권고하여 학교의 설립을 촉구하였다.076)한 예로≪황성신문≫은 경상도지역이 가장 개화에 부진함을 들어 1908년 6월 27일의 논설로<警告嶠南人士>를 실어 비판한 바 있었다.

또한 여성교육과 여권신장을 비롯한 풍속개량에도 관심을 집중시켰다.077)예컨대≪제국신문≫의 경우 崔起榮,<≪帝國新聞≫의 刊行과 下層民 계몽>(앞의 책, 1991), 48∼56쪽 참조.
崔起榮,<天道敎의 國民啓蒙活動과≪萬歲報≫의 發刊(위의 책), 100∼111쪽 참조.
복장·위생·관습·미신 등의 개량 또는 타파를 주장하여, 근대적 생활방식을 소개하고 실천하도록 권장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신문에 국가학·정치학·국제정치·역사 등 국민계몽에 필요하다고 인식한 분야나 농업·상업·공업 등 실제생활에 필요한 분야를 끊이지 않고 연재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와≪황성신문≫ 등은 국민의 애국심 고양을 위하여 외적의 침입을 격퇴한 국내외 영웅들의 전기를 연재하였다. 또 독립·혁명·혁신, 그리고 망국에 대한 외국사기에 관심을 가졌다. “(韓國人士의) 知識의 開發은 歷史가 緊要니 盖其興亡得失之蹟이 可鑑戒 者”라고 한 점으로도 그러한 관심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078)≪大韓每日申報≫, 1905년 10월 20일<歷史槩要>. 특히 외국사기의 대부분은 梁啓超의 저작을 번역한 것이었다.≪황성신문≫은<日本維新三十年史>(1906.5.1∼12.31)·<讀越南亡國史>(1906. 8. 28∼9. 5)·<讀意大利建國三傑傳>(1906.12.18∼12.28)·<斯巴達小志>(1907.4.5∼4.16)·<滅國新法論>(1907.6.11∼5.4) 등을 연재하였고,≪대한매일신보≫는<波蘭末年戰史>(1905.8.27∼10.13)·<世界歷史>(1910. 6.3∼8. 28) 등을 실었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도 촉구되었는데,≪대한매일신보≫에서는 신채호의<讀史新論>(1908. 8. 27∼12. 13) 등의 사론과 함께, 국난극복의 영웅으로<水軍第一偉人 李舜臣>(1908. 5. 2∼8. 8)과<東國巨傑 崔都統>(1909. 12. 5∼1910.5.27)의 전기를 연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대한매일신보≫와≪황성신문≫은 한국사를 고구려-발해 중심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독사신론>은 역사서술상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왕조중심의 전통사관을 극복하여 민족주의사학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한말 신문에 역사에 관련된 글들이 많이 실렸던 것은 당대 대표적인 역사가라고 할 수 있던 장지연·신채호·박은식 등이 모두 신문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한말 신문은 국민계몽을 통하여 여론을 주도하였다. 신문에 관여한 인물들은 대체로 改新儒學者 출신의 ‘周邊人 marginal man’들이어서 비판적인 면이 강하였다.079)李光麟,<개화기 한국의 신문>(≪韓國近現代史論攷≫, 一潮閣, 1999), 74∼75쪽. 비록 그들이 국민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지만, 국민대중이 여론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신문 발행이 가져온 주목되는 점이다. 따라서 한말 신문은 보도도 중시하였지만, 그보다 계도적인 기능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것은 신문 관여자들이 국민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愚民觀을 확인시켜 주는 점이기도 하나, 신문은 지배층뿐 아니라 국민대중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여론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나 신교육운동, 신문화운동이 전개되는 중요한 단서가 바로 신문에 있었다.

그리고 신문체제와 형태의 기본적인 골격이 비록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 일제에 대한 언론투쟁은 이후 한국신문의 저항민족주의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이에 대한 일제의 언론탄압 방법도 이후 한국사회의 어두운 일면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말 신문은 정보의 대중화와 여론형성을 실현하며 문명개화와 민족주의의 당위 등을 강조하여, 신문매체의 중요성을 국민대중에게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한말의 신문은 대중적인 기반 위에 서 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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