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3) 일제의 언론규제
  • (3)<신문지법>의 개정

(3)<신문지법>의 개정

통감부에서 한국정부로 하여금<신문지법>을 제정하도록 한 본래의 목적은≪대한매일신보≫의 규제에 있었다. 그러나<신문지법>은 한국인의 명의로 발행하는 신문에만 적용되었다. 이미 이들 신문은 사전검열과 정간조치를 통하여 규제가 가능하였으므로, 실제<신문지법>은 그것을 명문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인 발행의 신문은 1907년 7월 24일자로 개정된 별도의<保安規則>의 적용을 받게 되었으나,095)≪統監府公報≫, 1907년 7월 27일. 그 밖의 외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던 영국인 배델을 지목하여<신문지법>의 제정이 논의되었지만, 실제 반포된 법령에는 그 적용에 대하여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일제는 영국측과의 외교교섭이 진행중인데다가, 고종의 퇴위라는 급작스런 한국정세의 변화 때문에<신문지법>의 반포를 서둘렀던 것 같다. 그러나<신문지법>은 오히려≪대한매일신보≫의 성가를 더욱 높여 준 셈이었다. 따라서 통감부에서는≪대한매일신보≫를 주된 목적으로<신문지법>의 개정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지법>의 개정에는≪대한매일신보≫와 함께 국외에서 발행되어 국내에 유입되던 교포신문에 대한 규제도 계획되어 있었다. 미주 본토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공립신보≫와 그것을 계승한≪신한민보≫, 하와이에서 발행되던≪합셩신보≫와 그것이 개제된≪신한국보≫, 그리고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던≪죠신문≫과≪대동공보≫는 1908·1909년에 걸쳐 상당수 유입되어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 신문은 국외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아, 반일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와 교포신문의 규제를 목적으로 한 통감부의<신문지법> 개정의 움직임은 1908년 4월 20일자의 법률 제8호<신문지법>개정으로 드러났다. 친일정권으로 하여금<신문지법>을 개정하게 한 일제의 목적은 제34조에 명확하다.

外國에셔 發行 國文 或 國漢文 又 漢文의 新聞紙와 又 外國人이 內國에셔 發行 國文 或 國漢文 又 漢文의 新聞紙로 治安을 妨害며 又 風俗을 壞亂으로 認 時 內部大臣은 該新聞紙 內國에셔 發賣頒布을 禁止고 該新聞紙 押收을 得홈096)≪舊韓國官報≫, 1908년 4월 29일, 법률.

즉 이 개정은 교포신문과 국내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한 규제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란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1908년 4월 30일자로 반포된<新聞紙規則>으로<신문지법>에서 제외되었으므로,097)≪統監府公報≫, 1908년 5월 2일. 천주교와 기독교의 선교사들을 발행인으로 하고 있던 신문과≪대한매일신보≫뿐이었다. 종교계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부분적으로≪경향신문≫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대한매일신보≫를 규제대상으로 삼았음이 명약관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신문지법>의 개정에 의해서도≪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사전검열은 불가능하였다.≪대한매일신보≫가 이후에도 여전히 일제의 국권침탈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내용과 논조에 따라 압수만이 가능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압수처분은 이미 상당 분량의 신문이 배부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지법>개정 직후부터≪대한매일신보≫와 교포신문의 압수처분이 줄을 이었다. 국교저해·폭도선동·질서문란·국권회복·凶行선동 등이 압수의 이유였다. 1908·1909년 신문의 압수상황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3>과 같다.

   신문
연도
大韓每日申報 共立新報
新韓民報
합셩신보
新韓國報
죠신문
大東共報
大同公報
국 문 국한문
1908 A 5 8 19 10 20 3 65
B 4,936 6,727 10,264 542 1,569 668 24,706
1909 A 7 7 35 31 57   137
B 3,592 12,722 1,217 1,181 2,235   20,947
A 12 15 54 41 77 3 202
B 8,528 19,449 11,481 1,723 3,804 668 45,653

<표 3>1908·1909년 신문압수상황098)≪統監府施政年報≫ 해당연도분과≪警察事務槪要≫ 등을 참고로 재작성. A는 발행반포금지 횟수, B는 압수신문부수를 의미한다.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은 15회의 압수처분에 매회당 1,300부 정도가 압수되고 있었으며,≪공립신보≫와≪신한민보≫의 경우를 보면 거의 매호가 압수처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아울러 통감부에서는≪대한매일신보≫의 관여자, 즉 사장 베델과 총무 양기탁을 사법처분하고자 시도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미 통감부는 1907년 10월 9일 서울주재 영국총영사에게 베델을 고소하였으나 추방에 실패하였다. 일본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1908년 5월 27일자로 다시 베델을 질서문란과 폭동격려, 그리고 한국의 정부와 국민을 이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는 죄명으로 고소하였다. 그 결과 베델은 3주간의 禁錮와 보증금의 납부라는 판결을 받아, 상해로 가서 금고형을 받았다. 통감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베델이 상해에서 복역중이던 1908년 7월 양기탁을 국채보상금의 횡령혐의로 구속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저지와≪대한매일신보≫에 대한 규제를 목적으로 하였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양기탁의 구속사건은 영국정부가 항의하여, 양기탁은 2개월이 지난 9월 29일에 석방되었다.099)이에 관해서는 崔埈,<軍國日本의 對韓言論政策>과<梁記者拘束을 에워싼 英·日 간의 外交交涉>(앞의 책, 1976) 및 鄭晉錫, 앞의 책(1987)을 참고할 것.

결국 일제는<신문지법>의 제정과 그 개정으로 한국에서의 반일언론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일제가 이처럼 신문규제에 열심이었던 까닭은 신문의 국권회복운동이 그만큼 한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확산은 언론활동에 힘입고 있었다.100)이 문제에 관해서는 崔埈,<國債報償運動과 프레스 캠페인>(위의 책, 1976)과 鄭晉錫,<國債報償運動과 言論의 역할>(≪日帝經濟侵略과 國債報償運動≫)을 참조할 것. 따라서 일제가 신문의 어떠한 내용에 주목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당시 언론이 지향하던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장황하지만≪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4일자의 논설<所謂新聞押收處分>을 인용한다.

邇來로 內部에셔 動쳡 治安妨害 四字에 藉하야 本報及海外韓人同胞의 발行 新紙를 押收기에 吾儕 彼의 治安妨害라 云 範圍의 廣狹이 如何지 不知야 甚訝며 甚鬱엿더니 今에 內部 警務局에셔 발行 隆熙三年 警察事務槪要의 中에 右各紙 押收된 內容을 揭載얏 左와 如니

國權回復의 名을 藉야 日本保護를 反對야 反旗를 揭을 鼓吹 者

日本의 保護를 目야 韓國을 幷合이라고 誣야 一般韓民의 反感을 起케 者

無근의 流說을 傳야 人心을 惑亂케 고 又 事를 誇大히 布張하야 國民을 憤慨케 야 官의 施設을 妨碍고 社會의 秩序를 攪亂 者

國權回復은 國民의 共同一致를 要다 야 團軆의 組織을 獎勵 者

國權回復은 國民의 文明을 要다 야 新敎育의 普及을 唱導 者

海蔘威地方으로써 韓國人의 國權回復團軆의 근據지 기를 鼓吹 者

暗殺者를 義士라 야 此思想을 鼓吹을 努力 者

暴徒를 言야 國歌에 忠 者라 야 此에 聲援을 與 者…

噫라 團軆組織의 獎勵도 治安妨害라 며 新敎育普及의 唱導도 治安妨害라 은 果然 不可思議의 一奇法이로다 然則 團軆를 渙散케 이 治安이며 新敎育을 沮碍이 治安인가 其心中에 此思想이 有지라도 엇지 如此히 和盤托出뇨…

일제가 ‘치안방해’라는 명목으로 민족언론을 탄압한 경우는 기본적으로 국권회복과 국민단결에 관련된 논의였다. 구체적으로는 국권회복을 내건 일본의 보호 반대와, 단체조직과 신교육의 지원, 의열투쟁의 찬양, 의병 옹호 등이 일제가 문제로 삼은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일제가 한국의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봉쇄하고자 하였던 사실과, 신문을 중심으로 한 민족언론의 저항이 국권회복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논조로 다양하게 계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崔起榮>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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