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2) 교회의 발전
  • (2) 선교지역 분할과 교파 연합활동

(2) 선교지역 분할과 교파 연합활동

1885년 이래 구미제국의 각 선교단체들이 한국에서 경쟁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각 선교단체들간에 시간·인력·선교자금의 중복을 막고 효율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선교지역 분할(敎界禮讓:Comity Arrangement) 협의가 진행되었다.

인구 5,000명 이상의 대도시와 개항장은 각 선교부가 공동점유하고, 5,000명 미만 도시의 경우, 최소 1년에 2회 이상 선교사가 직접 방문하는 준선교기지(Sub-Station)를 설정·운영하고 있는 교파에 대하여 선점권을 인정한다는 등의 합의가 1892년에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부간에 이루어졌다. 양대 교파 선교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합의는 이후 여타 교파 선교부에 의하여 승인 채택됨으로써 한국에서의 선교지역 분할의 준거가 되었다. 한편 한 교파 교인이 다른 교파로 교적을 옮기려 할 경우 교회 담임자의 추천을 받도록 하고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한국인 助事·교사 등이 다른 교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서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통제를 제도화하였다.249)한국기독교사연구회, 앞의 책, 213∼214쪽.

장로회선교부간의 지역분할은 장로회연합선교공의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893년에는 남장로회가 충남·호남지역을,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원산지역을, 1909년에는 호주장로회가 부산과 경남지역을 각각 북장로회로부터 인수하였다. 감리회의 경우 서울·송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남감리회가 1901년 원산지역을 북감리회로부터 인수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1909년 대체로 그 윤곽이 확정된 선교회별 선교지역은 아래의<표 2>와 같다.

선교회명 도시 및 지방
북장로회 경기 서울 고양 파주 교하 양근 광주 과천 용인 양지 진위 양성
안성 시흥 김포 죽산 통진 지평 양주
충북 연풍 청주 문의 영동 회인 청산 보은 청안 옥천 황간 괴산
경북 대구 안동 경주 등 전 지역
황해 봉산 수안 곡산 황주 은율 문화 장연 신천 송화 풍천 안악
재령 평산 서흥
평남 평양 안주 숙천 영유 순안 강동 자산 삼등 중화 상원 영원
덕천 개천 순천 은산 맹산 성천 강서 중산 용강
평북 의주 용천 철산 선천 곽산 정주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남장로회 충남 대전 부여 목천
전북 전 역
전남 전 역
제주 전 역
호주장로회 경남 전 역
캐나다장로회 함남 원산 성진 문천 등 북부지역
함북 전 역
북감리회 경기 서울 인천 수원 안산 남양 교동 강화 부평 여주 광주 이천
음죽 양근 양천
충북 진천 음성 충주 제천 청풍 영춘 단양 괴산
강원 원주 횡성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
황해 옹진 강녕 해주 연안 배천 평산 신계 봉산 수안 서흥
평남 평양 양덕 함종 삼화 맹산 성천 개천 은산 순천 강서 증산
강동 용강
평북 태천 운산 회천 연변
남감리회 경기 서울 송도
강원 춘천 철원 양구 이천 지경대
함남 원산 회양 안변 용동

<표 2>1909년 각 선교회별 선교지역

이상의 선교지역 분할로 인력과 재정의 중복을 막고 선교회간의 마찰을 줄일 수 있었으나 한국내에 단일교회를 수립하는데 실패하였음은 물론 같은 교파내에서조차 각 선교부의 배경에 따라 분파적 현상을 보임으로써 후일 지방색에 따른 교권 분쟁과 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250)한국기독교사연구회, 앞의 책, 218쪽.

또한 각 선교회간의 지역 분할작업이 진행되던 1890년대 초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는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하여 그것이 완성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바, 영·미계 기독교선교부의 한국선교지역 분할점거와 일제의 식민지지배체제의 완성이 그 시기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교지역 분할점거가 일제와의 일정한 타협의 결과였을 가능성을 전망하게 한다.251)이만열, 앞의 책, 334∼335쪽.

각 선교회 지도부는 선교지역을 분할하는 이외에 연합활동에도 노력하였다. 장로교회의 경우 1889년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사이의 연합공의회(United Council of Missions in Korea)에 이어 한국에 단일 장로교회를 세울 목적으로 이미 장로교 4개 교파가 참여한 선교회공의회를 구성한 바 있다. 한 걸음 나아가 1905년에는 장로교 4파와 감리교 2파 150여 명의 선교사 거의 모두가 참여한 한국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선교사업에서의 협력뿐 아니라 장차 한국에서의 단일 개신교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목표를 표방하고 있었다.252)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Oct., 1901, p. 35. 공의회에서는 ‘장로교’·‘감리교’ 등을 대신하여 ‘대한예수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문제가 제안되었으며 양교파간의 교리적 차이 때문에 통합에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 장·감 양 교파의 통합논의가 진행중이던 캐나다연합교회의 교리를 한국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 교리의 전거로 삼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까지 논의가 진전되었다.

성서 번역사업과 大韓聖敎書會 사업에서도 장·감 양 교파의 협력체제가 구축되었다. 양 교파의 영문잡지≪The Korea Field≫와≪The Korea Methodist≫가 통합되어≪The Korea Mission Field≫가 창간되었으며 장로교의≪찬양가≫와 감리교의≪찬미가≫가 통합되어≪찬송가≫가 간행되는 등 문서·출판사업에서의 협력체제가 갖추어졌다.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따로 설치 운영하던 배재·경신·숭실·숭의 등 교육기관이 통합 운영되었으며 연희전문학교가 양 교파 연합으로 설립되었다. 세브란스의학교와 제중원·기홀병원 등 의료기관도 공동 운영되었다.

그러나 최대의 현안이었던 교파를 초월한 단일교회 수립에는 실패하였다. 서구제국의 기독교 발전과정에서 ‘진리의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거나 덜 중요시한 결과로 빚어진’,253)Missionary Union in Korea, The Korea Review, Sept., 1905, pp. 342∼343. 따라서 한국적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형성된 교파의 한계를 극복하고 단일 한국교회를 수립하고자 하는 한국교인들의 열망은 각 선교회 지도부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254)한국에서의 교파연합 실패 원인에 대하여 白樂濬은 ‘각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각 선교부는 각자의 사업강화에 열중하였고 자기 선교중심지에 필요한 자체 기관들을 설립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白樂濬, 앞의 책,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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