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4)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화
  • (3) 사회개혁운동

(3) 사회개혁운동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 중 하나는 봉건적 유교전통 속에서 오랫동안 강제되어 온 남존여비의 사회윤리를 타파하고 남녀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하도록 노력하고 실천한 것이었다.291)이만열, 앞의 책(1998), 429쪽. 이러한 남녀평등·여권신장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그 근거를 성서에 기초하여 그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파악한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1897년 12월 31일 정동예배당 청년회가 주최한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써 교육하며 동등권을 주는 것이 가하다’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하심이 무론 남녀하고 이목구비와 심의 성정은 다 한가지며 만물의 가운데 제일 총명하고 신령한지라, 동양풍속이 어찌하여 사나이는 기와집과 같다 하고 여편네는 초가집과 같다 하여 남녀간에 값이 높고 낮은 줄로 분별을 하는지 극히 개탄할 일이라…(≪독립신문≫3권 1호, 1898. 1. 4. 논설).

서재필은 남녀가 평등함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입장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교도들에 대한 계몽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남녀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할 것’292)≪대한그리스도인회보≫, 광무 2년 8월 3일,<녀학교론>., ‘男女七歲不同席 같은 폐습을 타파할 것’293)≪대한크리스도인회보≫, 광무 3년 5월 10일,<리화학당 녀학도의 화류>., 등 구체적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1901년 6월 황해도 평산의 한 교회에서는 교도들이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과 식사는 한자리에서 할 것’294)≪그리스도신문≫5-25, 1901년 6월 20일,<교회통신>. 등을 결정한 사실이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이러한 운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하여 무엇보다 여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초기 선교사들이 선교지침으로 채택한, 상류계급보다는 근로자 및 부녀자와 장차 어머니가 될 소녀들에게 선교의 중점을 두도록 한 네비우스 선교방법 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장로회공의회는 한국의 풍속 중에 고쳐야 할 다섯 가지를 조혼, 재가금지법, 불신자와의 혼인, 혼인시의 지참금, 부녀를 압제하는 일 등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이를 시정해야 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있다.295)≪그리스도신문≫, 5-40, 1901년 10월 3일. 각 교회들은 축첩이 성서적으로 죄가 된다는 사실을 교도들에게 가르치는 한편 축첩자가 入敎人이 되는 것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이미 교인이 된 자라도 첩실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자에게는 출교처분을 하는 등 구체적인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는 7인 창립교인의 한 사람으로 ‘최씨 부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녀는 1887년 10월 23일에 거행된 우리 나라 최초의 성례전(성만찬)에 참례296)이덕주, 앞의 글(1995), 24∼25쪽.함으로써 한국기독교가 여성 권익옹호의 선구적 기능을 함과 동시에 여성의 주도적 역할을 통하여 발전될 것임을 예견케 하였다.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기독교의 역할을 논함에 있어서 출판분야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성서를 비롯한 각종 도서류를 저술·번역·간행·반포297)선교개시 이래 1910년 이전까지 간행된 출판물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聖書 :≪누가복음≫(John Ross·John McIntire 李應贊 白鴻俊 共譯) 외 28종.
2) 讚頌歌 :≪찬미가≫(G. H. Jones·Miss L. G. Rothweiler 共編) 외 16종.
3) 敎理書·傳道文件·敎科書 등 74종.
4) 新聞 :≪죠션크리스도인회보≫(監理敎機關紙, 1897∼1899),≪그리스도신문≫(長老敎機關紙, 1897∼1905),≪대한그리스도인회보≫(죠션크리스도인회보 改題, 1899∼1905),≪그리스도신문≫(長·監兩敎派 聯合新聞, 1905∼1907),≪예수교신보≫(그리스도신문 改題, 1907∼1910),≪예수교회보≫(長老敎機關紙, 1910∼1914).
5) 韓國硏究書:A Korean Primer (John Ross p. 89, Shanghai, 1877) 외 17종.
金良善<韓國基督敎 初期刊行物에 關하여>(≪史叢≫12·13, 金成植博士華甲紀念論叢≫1968), 586∼597쪽 참조.
하므로 기독교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 한국 신문화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한글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고 그것을 재생·발전·보급시킴으로써 특히 여성의 문자해독율을 높였을 뿐 아니라 서구 과학사상의 도입, 새로운 인생관의 계발, 생활의 개선, 현대문학의 형성 등으로 한국사회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감리회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가 상해에서 인쇄기를 수입하고 일본에서 鉛活字를 제조해 와서 1889년 봄에 배재학당 구내에 三文出版社(The Trilingual Press, 후에 The Methodist Publishing House)를 세운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출판시설이었으며 1890년 6월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레이놀즈, 벙커를 창립위원으로 하여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The Korea Religious Tract Society)가 교파연합으로 설립되어298)李章植,≪大韓基督敎書會百年史≫(大韓基督敎書會, 1984), 16쪽. 한국기독교 출판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최초의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할 때 루미스(Loomis)와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 간행한≪마가복음서≫·≪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가지고 입국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입국하였을 때에는 이미 로스·매킨타이어와 이응찬·백홍준 등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하여 만주에서 번역 간행된 신약성서 복음서가 이미 서울과 서북지방 일대에 광범하게 반포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한 지 2년밖에 안된 1887년에 신약성서≪마가복음서언해≫를 출간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성서국역에 정성을 다한 것은 기독교 진리를 한국인들이 쉽게 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기독교도들의 한글해독율이 높아지고 문맹퇴치에 기여한 것은 그에 따른 부수적인 성과라 할 것이다. 최초의 번역본인 Ross Version≪누가복음서≫는 그 번역에 참여하였던 이응찬·김진기·백홍준 등이 평안도 출신이었던 관계로, 서울인사들을 통하여 수차에 걸쳐 수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북지방 방언이 많이 남아 있었다.299)金良善, 앞의 글(1967), 427쪽. 따라서 1887년 아펜젤러·언더우드·스크랜턴·헤론 등으로 구성돤 성서번역위원회는 로스버젼의 방언과 오역 등을 바로잡아 한반도 전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복음서를 1890년에 출간함으로써 한글의 대중화와 그 표준화에 기여하였다.300)李元淳,<聖書國譯史論考>(≪민족문화≫3, 1977), 39쪽.

예배의식에 사용된 최초의 찬송가로 감리교의≪찬미가≫가 1892년에 간행되고 다음해에 四聲部의 악보와 가사가 합편된 언더우드의≪찬양가≫가 간행됨으로써 서양음악 수용사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301)이만열,<찬송가의 편찬>(앞의 책, 1998), 366쪽. 이후 1907년 長·監 양 교파의≪합동찬송가≫가 公刊되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예배의식용 음악도서가 간행됨으로써 서양음악 보급과 그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이 신축되고 이상재가 종교교육부 총무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종교활동 이외에 목공·철공·제화·사진·인쇄 등 기술교육과 함께 축구·야구·농구 등 체육경기를 도입 소개함으로써 이 분야의 선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302)≪基督敎大百科事典≫2 (基督敎文社, 1981), 1189쪽.

또한 교회는 한국 전통사회의 구습을 타파·개혁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버려야 할 풍습으로 ‘농부의 집은 너무 깨끗하면 안된다’는 예로부터의 풍속을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려 한다든지, 사람들이 종일 서로 앉아서 공담만 하면서 정부관리들의 일을 헐뜯고 각색 핑계를 하며 일하기를 싫어하며 사람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등의 자세는 시급히 고쳐야 할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근로와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산과 언덕을 임의로 파지 못하여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보화를 캐어 쓰지 아니하고 타국 사람이 취한 바 되게 하니…’,303)≪그리스도신문≫5-32, 1901년 8월 8일. 이것이 광산채굴권 등을 외국에 빼앗기게 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풍수사상 등 민간정서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부터 비롯된 일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폐습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또한 ‘술은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 하는 물건’304)≪대한크리스도인회보≫48호, 1897년 12월 30일.으로 규정하여 戒酒論을 지어 교도들에게 금주를 요구하고 있다. 북감리교 선교사연회는 “또 술 먹는 것이 크리스도교의 큰 원수도 되려니와 교중일에 방해가 되니 우리 교에 유전하는 말대로 무론 무슨 술이던지 도무지 일절 금단하며…”305)≪죠션크리스도인회보≫22호, 1897년 6월 30일.라고 교단의 공식 결정을 교도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담배와 아편에 대하여서도 건강을 해치고 가정과 사회의 경제를 피폐하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하면서 교도들이 금해야 할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의 초기 재한 선교사들이 경건주의적 보수신앙 노선을 신봉하는 성직자들이었다는 사실은 한국기독교의 특징적 현상으로 술·담배 등에 대한 엄격한 금제를 규범화한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유일신에 대한 절대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초기 한국기독교는 불교를 포함한306)李萬烈은 당시의 불교가 미신화하고 있었던 것도 그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李萬烈,≪韓國基督敎와 歷史意識≫, 知識産業社, 1981, 31쪽). 풍수지리·제례·占卜 등 민간신앙에 대하여 이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그 타파에 진력하였다. 조혼의 폐습을 개혁하기 위하여 장로회공의회는 지참금제도와 함께 이를 공식적으로 금하기로 결의한 바 있으며, 장성한 남녀가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동등한 자격으로 결혼하는 서양의 풍습을 소개하면서 교도들에 대하여 이러한 형태의 혼인을 권장하고 있다.307)≪독립신문≫, 4-164, 1899년 7월 20일. 장례에 있어서도 ‘머리 풀고 크게 우는 것과 베옷 입고 삼년상 입는 것과 장사지낼 때에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배불리 먹는 것은 없이할 풍속’308)위와 같음.이라 하여 유교가례에 의한 허례를 버리고 죽은 이에 대한 진정한 추모를 드릴 것을 강조하면서 서양식의 장의제도를 장려한 것 등은,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폐지하도록 한 조치와 함께 사회적 반대에 부딪치므로 이후 교회와 전통사회간의 한 갈등요인이 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국인 자신들에 의하여 만주와 일본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다. 미국선교사들에 의한 공식 선교가 시작된 후 교세가 확장 발전함에 따라서 기독교는 전통사회의 모순을 타파 극복하고 근대적 가치를 구현하는데 기여하였으며 국권이 위협받고 있던 시기에 있어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충군애국의 방법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이후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동력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趙英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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