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3) 화학

3) 화학

化學이란 용어는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졌고, 이 말은 아마 1870년대쯤에는 조선 지식층에게도 중국에서 나온 책을 통해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1884년 5월과 6월의≪漢城旬報≫에는 산소·수소·질소·탄소·염소·탄산가스 등을 나타내는 중국 용어들이 소개되고, 그 원전을≪化學鑑原≫으로 밝히고 있다.≪화학감원≫이란 책은 6권으로 1872년 江南製造局에서 후라이어(傅蘭雅, John Fryer)와 중국 근대화학의 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화학자 徐壽가 번역해 낸 책이다. 근대화학의 내용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이란 말은 그보다 훨씬 전 1850년대에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조선에 그 말이 전해진 것은 이 기사보다 얼마나 이른 일인지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405)坂出祥伸,≪中國近代の思想と科學≫(同朋舍, 1983), 특히 4장 4절 청말민국초 化學史의 일측면-元素漢譯名의 定着과정.

하지만 실질적인 근대화학에 접한 조선인으로는 오히려≪한성순보≫에 소개된 화학 내용보다 먼저 1881년 중국 천진 기기창에 유학갔던 우리 기술 유학생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행의 이들 유학생은 38명이 중국에 파견되어 그 가운데 일부 학생이 화학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화학자로는 이들을 꼽을 수밖에 없을 성싶다. 예를 들면 이 유학생 가운데 金台善·黃貴成은 산(䃨水=酸)에 대하여, 그리고 金興龍과 金德洪은 화약에 대해 공부하도록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황귀성은 두 달 뒤 3월에는 수은·염산·알코올 등을 가지고 와서 함께 중국에 가 있던 영선사 김윤식 앞에서 신기한 화학실험을 해 보여준 기록도 보인다.406)金允植,≪陰晴史≫상, 고종 19년 1월 8일(62쪽), 고종 19년 3월 11일(114∼115쪽).

또한 원래 영어를 배우던 李熙民에게 5월 28일에는 ‘화학’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407)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5월 28일(168쪽). 이들은 이듬해 1882년 국내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거의 바로 다 철수했는데, 그 때 가지고 귀국한 책들 가운데에는 화학책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실험기구와 화학약품도 여러 가지 수입되었다. 다만 그 후 이들 최초의 화학자들이 어떻게 되었던가는 아직 연구된 일이 없다.

1882년 유명한 池錫永의 ‘개화 상소’에는 그가 생각한 여러 가지 개화에 필요한 책 이름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중국에서 나온≪박물신편≫·≪격물입문≫·≪격치휘편≫이 들어 있고, 국내에서 나온 安宗洙의≪農政新編≫도 들어 있다. 이들 과학관련 서적은 상당한 수준의 화학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책들이 이미 조선 후기에 국내에 수입되어 읽혀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화학 수용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안종수의≪농정신편≫은 1881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갔다가 당시 일본의 농학자 쓰다 센(津田仙)의 농업기술을 책으로 얻어다가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 그 내용 가운데에는 근대화학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쓰다는 화란의 농학자의 서양 농사기술을 배워 들여왔던 것이었다.408)李光麟,<安宗洙와≪農政新編≫>(앞의 책, 一潮閣, 1974), 220∼233쪽.

1866년에 쓴 것으로 밝혀진 최한기의≪신기천험≫은 주로 서양 근대의학을 소개하고 있으나 제8권에는 물리학과 특히 화학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온다. 당시까지에 가장 상세한 근대화학이 소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物類之元質)을 56가지라고 말하고 있다.409)朴星來,<19세기 서울 사람 崔漢綺의 세상 구경>(≪典農史論≫2, 1996), 115쪽. 중국에 나와 있던 서양과학서를 참고하여 소개하고 있는 그의 노력은 때로는 엉뚱한 오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지구 둘레를 싸고 있는 공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이 숨쉬는 공기를 生氣라 하지만, 이를 나눠 보면 養氣·淡氣·濕氣·炭氣·輕氣·電氣 등으로 나눠진다는 것이다.410)崔漢綺,≪身機踐驗≫8:1b(여강출판사 영인본 권 1, 493쪽). 물론 이런 분류는 지금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다. 이어서 이들 기체에 대해 설명이 상세하게 이어진다. 물론 양기·경기·담기·탄기로 이어지는 기체 이름은 요즘 표현으로는 산소·수소·질소·탄소(사실은 탄산가스) 등을 차례로 가리킨다. 또 계속해서 황산·질산·염산 등의 산에 관한 설명도 있다.411)崔漢綺, 위의 책 8:11b∼14b, 498∼499쪽.

앞에 소개한 1881년의 영선사행의 유학생들이 배운 근대화학의 내용이 글만으로는 이미 최한기의 책에 소략하게나마 소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소개는 아직 당시 조선 지식인에게 읽히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혹시 누가 읽었다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는 아주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근대화학의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글로만 중국자료가 옮겨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최한기 자신조차 무슨 뜻인지 모른채 베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보다 대중적으로 근대화학의 내용을 국내에 소개한 경우로는≪한성순보≫를 들 수 있다.≪한성순보≫ 22호에는 중국에서 나온≪化學鑑原≫을 베낀 기사로 산소·수소·질소에 대한 기사가 양기·경기·담기라는 표현 아래 실려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화학 소개가 있는데, 15호에 실린<化學功用>이란 기사는 당시 조선 지식층이 얼마나 근대화학에 무지했던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시간당 5천개의 달걀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게 되었다는 전혀 화학과 상관없는 듯한 기사가 그것이다.412)朴星來,<한성순보·한성주보의 근대과학 수용 노력>(≪新聞硏究≫36, 1983 겨울), 49쪽.

1899년의≪독립신문≫에는<화학이 요긴한 것>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413)≪독립신문≫, 광무 3년 7월 31일. 아주 흥미로운 이 기사는 하루치 신문의 3분의 1이나 될 정도로 아주 길게 쓰여져 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농토는 많고 사람이 적어야 좋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오늘날 농사는 화학의 발달로 개혁되고 있으니, 화학을 연구하면 훨씬 효과적인 농사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화학의 이치를 날로 궁구할수록 먹을 물건이 날로 더 생기리라…화학의 이치로 전답을 다스릴 것 같으면, 척박한 흙이 변하여 좋은 밭이 될 것이요…밀가루의 이치를 분석하여 보건대 100근 가운데 1근 쯤은 그 땅에서 나온 힘을 받고, 99근은 모두 공기의 힘으로 된 것이다. 공기란 취하여도 다하지 아니하고 한없이 있는 물건이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취하여 사용한 사람이 오직 鏻기와 鉀기와 淡기를 쓸 줄 모르더니 화학가에서 그 세 가지 기운을 다 발명하였음에…그뿐 아니라 나무는 원래 炭기와 養기로 자라는 것이라…(순 한글기사를 현대문장으로 고침, 한자는 원래 들어 있는 대로임).

이 글은 독일에서 곡식 씨앗 4개를 심어서 1,335개 낟알을 얻었고, 또 다른 실험에서는 메밀 한 알을 항아리에 심어서 796알을 수확했다고도 쓰고 있다. 따라서 이 논설의 결론은 “대한 사람들도 화학공부에 힘들을 조금 썼으면, 대단한 이익이 분명히 목전에 있을 듯하도다”라고 되어 있다.

1907년의≪고등소학독본≫에는 ‘空氣’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무릇 空氣라는 것은 兩質로 합성한 것이라, 하나는 養氣니 능히 養生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淡氣니 양생에 불능한 것이라. 此氣는 지면을 덮어 높이가 약 150리 남짓이니…”414)≪高等小學讀本≫권 2(1907), 81쪽.

아직 조선에서는 근대화학의 기본용어라 할 수 있는 공기의 이름이 중국에서 채택했던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쯤부터는 일본의 화학교재를 옮겨 오기 시작했고, 자연히 양기·경기·담기 대신에 산소·수소·질소라는 일본식 용어가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1909년 5월에 백과사전 같이 당대의 상식을 모아 책으로 내면서 皇城新聞社의 張志淵은<물의 분자>(水分子)라는 항목에서 라봐지에(Lavoisier, 拉布亞塞)가 18세기 말에 물은 養氣와 輕氣가 결합된 것임을 발견했다고 써 놓고 있다.415)張志淵,≪萬國事物紀原歷史≫, 49쪽. 1909년이라는 시점에서 장지연은 한자 표현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화학용어조차 중국의 것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는 아직 일본책을 별로 접하지 못한 채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서양 근대과학 가운데에도 특히 화학이 관심을 많이 끌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1850년대부터 약 반 세기 동안 번역되어 나온 서양과학서 가운데 단연 화학책이 많았고,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현상을 주목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에게 당시 물리나 수학보다 화학이 인기를 끌었던 원인으로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염료·화약·비료 같은 것이 모두 서양문물 가운데 크게 주목받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416)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임성모 역),≪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 146∼148쪽. 어느 의미에서는 중국과 조선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화학은 관심을 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가장 실용적인 서양과학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영선사행으로 갔던 기술유학생 가운데에서도 이런 현상을 느끼게 된다. 앞의 수학과 물리학 부분에서 소개한 것처럼 화학 역시 근대교육이 시작되고, 일본유학이 확대되면서 조금씩 국내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화학의 경우는 80년대 이후의 몇 가지 정부의 기술기구와 공장, 그리고 1902년의 공업전습소 시작이 보다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앞에 물리학분야에서 소개한 물리학과 겸한 교과서를 빼고 화학분야만을 다룬 당시 교과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1907,≪奇術學≫, 宋致用 저, 元泳義 校閱, ? 1908,≪近世小化學≫, 閔大植 저, 徽文館    ≪新撰化學敎科書≫, 正銑 교열, 義進社

≪奇術學≫의 교열자로 되어 있는 元泳義는 몇 가지 책을 낸 것으로 밝혀져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보이는 저서는 단군부터 고려까지를 다룬≪新訂東國歷史≫(1906)와 조선시대 역사를 쓴≪國朝史≫(1910?) 등 국한문 혼용의 역사책을 들 수 있다. 그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앞의 물리학을 소개한 인물들처럼, 화학을 정식으로 교육받거나 나중에라도 화학을 전공으로 공부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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