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6) 세계관의 변화

6) 세계관의 변화

개화기의 근대과학 수용은 이웃 나라-중국·일본-와 비교해 보면 아주 늦고 있었음을 금방 알게 된다. 중국의 경우는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과학의 상당 부분이 번역되어 들어오게 되지만, 그에 대한 높은 관심과 배우려는 열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편전쟁에 패배하고 南京조약(1842)으로 이른바 불평등조약시대에 들어간 다음에서야 중국인들은 크게 깨우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그 훨씬 전부터 나가사키(長崎)에 정착하여 일본과의 무역을 계속하고 있던 화란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서양배우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서양문명 배우기는 18세기에는 많은 화란어 통역을 낳게 되고, 이들의 노력으로 화란의 과학책이 일본어로 옮겨져 나오게 된다. 중국에서는 더 많은 서양책이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번역되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관심 밖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더 적은 수의 서양과학 책이 일본에서 번역되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이미 일본인에 의한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1774년 서양해부학 책이≪解體新書≫라는 일본어 번역으로 나온 이후 화란의 자연과학이 착착 일본에 번역되고 번안되어 나왔고, 19세기 초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서양과학이 일본인에게 소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19세기 중반까지도 조선에는 아직 서양의 자극도 크지 않았고, 당연히 조선인들의 서양문명에 대한 자발적 욕구가 크지 않았다. 서양을 공부하고 연구하겠다는 의식을 지식층이 가지게 될 정도가 아니었고, 결국 실제로 서양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76년의 개국 이후로 넘겨졌다. 1876년은 바로 일본에 최초의 근대식(서양식) 대학으로 동경대학이 문을 열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나라 문이 열리자 조선의 지식층에게 가장 놀라운 서양문명의 부분은 과학기술임이 분명했다. 다른 부분이 조선의 전통에도 그런대로 갖춰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서양의 과학만은 도저히 그 비슷한 것을 찾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당연히 개화기 초기에는 서양과학 내용을 배워 익히기에 온갖 열성을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 모습은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한성순보≫가 얼마나 서양과학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던가를 보면 충분하다. 특히 천문학과 지리학을 포함하여 세계의 정세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당시 지식층의 호기심과 지식욕의 초점이 되었다.

또 각급학교가 1880년대에 시작하고 90년대에 더 활성화하면서 각급학교는 다투어 과학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 과학을 가르치기에는 충분히 교육받은 교사가 절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하여 조선의 지식층은 그 전까지와는 달리 일식이나 혜성 같은 자연현상에 대해 그 재이로서의 해석을 버리고, 그저 과학의 연구대상으로 파악할 줄 알게 되었다. 또 새로운 우주상과 그 안에서의 지구의 위치, 그리고 지구상에서의 서양 각국의 중국보다 부강한 위치 등에 눈떠서 세상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라 안에서 중국과 일본이 각축하고, 이어서 일본이 러시아까지 물리치는 것을 보고 많은 조선의 식자들은 부강의 기술로서의 과학에 더욱 주목하면서, 또 중국을 점차 얕보고 오히려 일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0년 전후에 이미 일본유학생이 갑자기 많아진 것은 이런 세계관의 변화가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급하게 시작된 일본유학은 과학기술의 수용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주도한 유학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거의 모든 유학생이 자비에 의한 개인 유학이어서, 체계적인 새 지식과 문명의 흡수를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1900년 전후 아직 일본어가 전혀 보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유학은 시작되었고, 당연히 일본에 간 초기 유학생들은 먼저 말을 배우는데 시간을 소비하면서 돈과 시간을 허비하고는 막상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얻지도 못하는 수가 많았다.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일본에서 과학을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아주 적다. 1945년 해방 때까지를 계산해도 이공계 대학졸업자가 겨우 204명뿐이었으니, 1910년 이전에는 1906년 동경제대에서 조선공학을 공부하여 졸업한 상호(尙灝, 1879∼?) 단 1명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25)박성래,≪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교보문고, 1998), 277쪽.

미국에 유학한 조선인은 전체 유학생 숫자로는 일본보다 훨씬 적었지만, 대학 졸업자수는 해방 당시까지는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웠다. 邊燧(1861∼1891)가 처음으로 농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徐載弼(1864∼1951)이 첫 의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오히려 미국에서 일본보다 일찍 대학졸업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조선에 돌아와 활동할 기회란 없었다. 아직 국내 사정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1900년 전후의 국내 실정이 대개 개화파 청년들이었던 이들의 귀국활동에 좋은 환경이 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이런 불운을 상징하듯 최초의 미국학위 취득자 변수는 졸업한 해 가을에 모교 안의 역에서 철도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서재필은 귀국했지만 그가 공부했던 의학이나 과학분야가 아니라, 사회개혁운동에 헌신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426)박성래, 위의 책, 250∼251쪽.

개화기의 과학수준은 대중적인 소개 정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자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조선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못한 채 조선왕조는 1910년을 맞게 되었다. 1906년의 국어교과서인≪초등소학≫권 6은 기선과 기차(제9과), 지구(제10과), 금속(제17과), 공업(제25과)이라는 제목을 달고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 7에는 초목의 생장과 번식(2과), 신체의 건강(3과), 공기(4), 전기(7), 화원(8), 비료(9), 석탄과 석유(18) 등이 과학기술관련 단원으로 되어 있고, 권 8에는 소금과 설탕(1), 위생(2), 인체(3), 우편과 전신(19), 태양과 태음(22·23) 등이 들어 있다. 특히 해와 달을 설명한 이 대목에서는 그림까지 그려서 계절이 생기는 이치와 일식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국어책이 바로 과학교재 노릇도 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427)學部 編輯局,<國語>4(≪韓國開化期敎科書叢書≫, 亞細亞文化社, 1977).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국어책도 마찬가지였다. 국어시간을 통해서도 당시에는 과학에 대한 상식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는 당시의 조선 지식층의 과학상식이 어느 수준에 있었던가를 살피기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된다.

개화기 동안에 조선 지식층은 이미 상당히 근대과학에 대한 상식을 풍부히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 속에 근대과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곧 일본으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되면서 두 나라가 받아들인 서로 다른 근대과학의 모습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은 채 조선은 식민지시대를 맞고 있었다. 예를 들면 張志淵(1864∼1921)은 1909년에 과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과학이란 “近代 泰西學者의 發明함이니, 그 實은 東洋 聖賢의 格物學과 六藝의 術이라”는 것이다.428)張志淵, 앞의 책, 48쪽. 장지연은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었건만 일제가 이미 몇 년째 조선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이 시점에서조차 그는 아직도 중국의 서양과학 수용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중국식 용어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조선 국내에서의 교육에서는 일본식 교과서가 채택되고 있었건만, 그는 아직 중국식 서양과학을 말하고 있다.

근대과학의 초보적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지만, 아직 과학자는 한명도 생산되지 못하고 있던 1910년대의 조선왕조였다. 식자들은 서양 근대과학의 힘을 크게 믿기 시작했고, 전통과학의 틀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지만, 막상 과학의 내용을 깊이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 실정이었다. 과학을 덮어 놓고 믿어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는 科學主義의 태도가 이 시기에는 이미 싹트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런 과학주의는 식민지시대 과학의 발달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인들의 지적 특징이며 한결같은 열망으로 지속되었다. 한국의 첫 근대소설로 여겨지는 1917년 李光洙(1892∼1950)의≪無情≫마지막 대목은 영어교사인 주인공 이형식이 자신의 장래 포부를 말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교육가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뜻은 참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李光洙,≪無情≫;≪李光洙全集≫1, 三中堂, 205∼207쪽).

개화기의 과학 수준은 그대로 식민지시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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