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2) 근대 의료기술
  • (2) 일본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2) 일본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개항 이전에도 서학서들을 통해서 서양의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서양의학과 직접 접하기는 개항 직후 수신사 金綺秀 일행이 일본에 파송되면서부터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은 이후 통상장정 등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부국강병의 실상을 과시하고자 우리 나라에 사신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도 일본의 국내 사정을 알고자 하였으므로 수신사 김기수 일행을 일본에 파송하였다. 이 때 일본은 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선 黃龍丸을 부산에 보내고 여기에 일본의 군의를 동승시켜 수신사 일행을 돌보게 했다. 일본에 가는 길에는 大軍醫 시마다(島田修海)가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대군의 사네요시(實吉安純)가 수행하였다. 사네요시는 배 안에서 수신사 일행인 김응상·김불이·노명대 등을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기수의 요청으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수행원 박영선에게 종두법과 서양의학서를 소개하고, 부산에 도착하여서도 판하촌에서 10여 명의 조선 아이들에게 종두를 접종시키고 몇 명의 환자를 진료하기도 하였다.473)≪釜山府史原稿≫5권, 163∼164쪽. 이 때 사네요시가 소개한 서양의학서는 영국의 의사로서 서양의학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한 홉슨(Benjamin Hobson)의≪全體新論≫·≪內科新說≫·≪婦嬰新說≫·≪博物新編≫등이었다. 그리고 150인분의 痘苗와 키니네(鷄哪) 등 서양 의약품도 약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일본 군의들이 치료했던 질병은 김응상의 디프테리아, 김불이의 농창수술, 노명대의 충치뽑기, 김기수의 혓바늘, 한 가마꾼의 임질 등이었다. 이러한 일본 군의들의 활동은 수신사 일행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며, 이 점이 바로 일본측이 노리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474)김승태,<일본을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과 그 성격>(≪國史館論叢≫6, 국사편찬위원회, 1989), 227∼228쪽.

개항 후 일본인의 왕래가 많아지고 거류지에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항장에 일본인 병원들이 생겨났다. 1876년 11월 부산에 濟生醫院을 세운 것을 비롯해서, 1880년 원산에 生生病院을 세우고, 1883년에는 인천과 서울에 영사관부속병원과 일본관의원을 각각 세웠다. 부산 제생의원에는 초대 원장으로 일본 해군 대군의 야노(矢野義徹)가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의 국익을 위하여 한국인에 대한 의료 활동과 종두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자였다. 이 의원은 곧 일본 외무성 관할에서 해군성 관할로 이관되었으며, 그들의 설립 의도야 어떻든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의술에 의한 설비를 갖춘 병원이었다.475)三木榮, 앞의 책, 269쪽. 이 의원은 당시 일본의 최신식 의료기구와 의약품류를 구비하고 있었다. 1879년 10월 원장이 마츠마에(松前讓)로 바뀌었는데 이 무렵 지석영이 제생의원을 방문하여 원장과 소군의 토즈카(戶塚積齊)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痘苗와 종두침을 얻어와 향리인 충주군 덕산면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다.476)金斗鍾,≪韓國醫學史≫(1966), 476쪽. 이 의원은 이와 같이 서양식 종두 보급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며, 간간이 한국인 환자들을 치료하여 한국인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여기서 진료 받은 한국인은 1880년 729명, 1881년 675명으로 전체 진료환자수의 20%를 넘지 않았다.477)김승태, 앞의 글, 231쪽. 제생의원은 1883년 해군성에서 육군성으로 이관되어 일본 육군 일등군의 코이케(小池正直)가 원장을 맡았다가, 1885년 그 운영이 일본 거류민단으로 이관되고 그 명칭도 日本共立病院으로 개칭되었다.478)이 共立病院 초대 원장은 佐佐木學이었다(三木榮, 앞의 책, 270∼271쪽).

일본은 원산에도 1880년 5월 개항되자마자 곧바로 대군의 야노와 군의 도다(戶田)를 파견하여 生生病院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의 설립 목적도 부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대한 진료와 한국인의 회유를 위한 것이었다. 이 병원에서 진료받은 한국인은 1880년 1,126명에서, 1881년 695명으로 줄어드는 반면, 일본인 진료자는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병원설립 의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다. 이 병원도 처음에는 일본 해군성 소속이었으나 1884년 육군성으로 이관되고, 1886년 다시 이 지역 일본거류민에게 이관되어 공립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에 외무성이나 해군성에서 병원을 개척하고, 육군의 진주와 함께 육군성으로 그 관할권을 이관하였다가 거류민의 이주가 충분히 이루어지면 이를 공립병원이라 하여 그 지역 일본 거류민들에게 이관하였던 것이다.479)이러한 일본인 거류지의 공립병원은 한국병탄 후에는 조선총독부에 편입되어 자혜의원 내지 부립병원이 되었다.

서울에도 일본공사관의 설치와 함께 해군 대군의 마에다(前田淸則)를 醫官으로 배속시켰다가 임오군변으로 철수하고, 1883년 6월 다시 일본공사관의원을 개설하여 의관인 일등군의 카이세(海瀨敏行)로 하여금 한국인 환자 진료에도 응하도록 하였다.

인천에도 일본영사관의 요청에 의해 1883년 10월 육군 3등군의 타나카(田中親之)와 육군 2등간호장 나가노(永野四郞)를 파송하여 영사관부속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도 1888년 거류민에게 이관되어 인천공립병원이 되고, 이 무렵 이데타(出田龍馬)가 이 지역에 일본인 민간병원을 차려 내과와 외과를 개업하였다. 서울에도 1886년 일본공사관 의관으로 내한한 고지로(古城梅溪)가 1891년 관직을 사직하고 공사관 공의를 겸하면서 贊化醫院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그는 찬화의원 안에 종두의양성소를 설치하고 교재로≪종두신서≫를 저술하여 가르쳤다. 그는 1899년에 관립의학교 교사로 고빙되어 교수하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고, 대신 고다케(小竹武次)가 그 후임으로 고빙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의 漢城病院, 대구·평양·용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동인의원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지원하던 일본인 민간의료기관이었다.480)동인의원의 침략지원 의료활동에 관해서는 김승태, 앞의 글, 241∼242쪽 참조. 이와 같이 일본인에 의한 민간의료활동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 거류민이 격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일제의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여 철도·경찰·학교·회사 등의 촉탁의를 겸하면서 개업하는 일본 의료인들도 많이 생겼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병원 및 의료인 통계는 다음의<표 1>과 같다.

연 도 병 원 의 사 간호부 연 도 병 원 의 사 간호부
1907 46 165 95 1909 82 336 221
1908 82 263 130 1910 102 368 220

<표 1>일본인 병원 및 의료인 통계(1907∼1910)

전거:≪통계연보≫(1907∼1910).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기간에 군사적 필요에서 경성위수병원, 평양위수병원, 나남위수병원, 회령위수병원 등을 세워 군진의료활동을 폈으나, 이러한 의료활동은 민간의료활동에 비해 한국인의 서양의학 수용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481)다만 1887년부터 2년간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李基元이 청일전쟁 때 일본군 야전병원에서 2년간 견습하였던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김승태, 위의 글, 238쪽).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료분야에서도 식민지배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토(伊藤博文)통감은 그 해 7월 일본 육군 군의총감 사토(佐藤進)를 불러들여 위생 수뇌기관을 만들게 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의 광제원의학교 및 대한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하여 대한의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1907년 3월 칙명으로 대한의원관제를 발표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내부대신이 원장을 겸하도록 하였으나, 그해 12월 관제를 개정하여 이듬해 1월 사토가 직접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는 일본인에 의한 의료기관의 완전한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치료부·위생부·교육부를 두어 진료와 함께 위생사업과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교육부는 1909년 부속의학교로 개칭되고, 병탄 이후에는 대한의원이 총독부의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되었다가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482)≪朝鮮總督府醫院二十年史≫, 11∼21쪽.

그 밖에도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탄할 계획을 세우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탄압하는 한편, 이들 일본 군경들에 대한 의료지원과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부터 각 지역에 慈惠醫院을 설립하여 일본 군의들로 하여금 그 책임을 맡게 했다.483)1910년 10월에 임명된 각도 자혜의원의 의원 25명은 모두가 일본인 군의였다(<朝鮮總督府官報> 호외, 1910. 10. 1일자;김승태, 앞의 글, 251쪽). 이러한 자혜의원들은 그 설립목적과 같이 무단통치하에서 일본 군경을 지원하고 한국인을 회유, 친일화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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