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직기술에서 확인되듯이 대한제국시기를 통하여 조선인이 설립·운영한 방직공장이 공장제 수공업 수준에서 근대식의 개량된 직기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1915년까지는 수동식에 머물렀고 원동기를 사용한 본격적인 기계기술은 수용·이식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569)흔히 ‘근대화’라는 정책 아래에서 새로운 기술이 이식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반응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패턴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전면수입형으로, 기계·설비와 더불어 원료 등도 모두 수입하고, 재래의 환경조건을 무시하여 신기술에 적합한 노동력·시장 등의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경우이다. 둘째는 절충형으로, 수입된 기술이 토착의 재래기술에 비약적 발전의 계기를 주어, 신기술과 재래기술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독자의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경우이다. 셋째는 거절형으로, 수입된 기술이 구래의 사회적 조건과 어울리지 않아서 신기술이 정착하지 않고 거절되는 경우이다(海野福壽,<西歐技術の移入と明治社會>,≪技術の社會史≫권 3, 有斐閣, 1982), 13∼14쪽. 이 글에서는 일본의 방직기술이나 정미기술이 도입되어 이식 및 정착되는 과정을 ‘전면수입형’으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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