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한국에서의 공업발전을 억압하는 정책으로<회사령>을 공포했다.<회사령>은 한국내에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한국 외에서 설립한 회사의 본점이나 지점을 한국에 설치할 경우에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이러한 조처를 취한 것은 당시 일본의 자본축적이 미약했다는 조건도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자본축적과 공업발전을 억제함으로써 한국을 식량·원료의 공급지이자 일본상품의 판매시장으로 묶어 두려는 데 있었다. 즉 제국주의 본국과 식민지의 산업구조를 확연히 구분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회사령>을 공포하는 이유로서, 한국인은 법률상·경제상의 지식·경험이 부족하여 복잡한 회사조직의 사업을 경영할 수 없고, 일본인 자본가 또한 한국 실정을 몰라 예측치 못한 손해를 입을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조선산업의 건전한 발달을 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157) 朝鮮總督府,≪施政二十五年史≫, 116∼117쪽.

 이것은 겉으로는 대단히 친절한 대접같이 보이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회사령>에는 회사가 본령 혹은 본령에 근거하여 발한 명령·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공공질서 혹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는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제2조),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의 설립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5천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부실신고를 하여 허가받은 자도 이와 같다(제12조)158)≪官報≫, 1910년 12월 30일, 號外. 등과 같은 독소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총독이 민간인의 경제활동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얼마나 강대하고 포학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회사령>은 형식상으로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 모두 적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회사령>은 일본경제와 한국경제를 분리하려는 테라우치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든지,159) 小林英夫,≪植民地への企業進出-朝鮮會社令の分析≫(栢書房, 1994). 일본의 유력한 자본은 유치하되 歐美 열강의 광산자본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160) 小林賢治,<朝鮮植民地化過程における日本の鑛業政策>(≪經濟科學≫34-4, 1987). 그렇지만<회사령>은 한국인 기업의 설립과 성장·발전을 억압하고, 전통적 도시의 발달을 저지하는 한편, 개항장·개시장·철도연선·군사기지 등 일제의 침략과 관련된 신흥도시의 발전을 조장하며, 이들 도시부에서의 일본자본의 팽창·확대를 촉진했다.161) 孫禎睦,<會社令硏究>(≪韓國史硏究≫45, 1984).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일본이 막대한 초과이윤을 획득하자 일본자본은 한국으로 투자를 확대하였다. 1914년에는<회사령>의 시행규칙이 개정되어 회사설립의 허가조건이 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권력과 자본이 야합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전북 輕便鐵道株式會社의 추문이 그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자신이 허가한 일본 회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지원했다. 전라북도에서는 1府 28郡의 공무원과 경찰서장·순사·헌병까지 나서 해당 회사의 주식을 모집했다. 그 과정에서 수뢰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162) 中野正剛, 앞의 책, 46∼47쪽.

 <회사령>의 적용은 이처럼 자의적인 면이 있었다. 일본인 기업 특히 식민지지배 정책을 추진하는 데 직접적 도움이 되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응했다.<회사령>이 실시된 이후(1910∼1919년)의 회사설립 상황을 살펴보면, 한국 외 회사의 지점설치 신청 91건(허가 85건), 한국 외 회사의 본점설치 신청 11건(전부 허가), 한국 내의 회사설치 신청 676건(허가 556건), 기존설치 회사에 대한 해산명령 7건, 기존설치 회사의 지점 폐쇄명령 1건이었다.163) 大藏省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朝鮮編 제6分冊, 7쪽.

 <회사령>의 실시 기간에 회사설치의 허가를 받은 것은 일본인 회사 쪽이 훨씬 많았다. 1911∼1919년까지 8년간 한국인 회사의 증가수는 36개로, 일본인 회사의 180개에 비해 아주 적었다. 또 한국인 회사의 납입자본도 일본인 회사보다 훨씬 적어,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영세했음을 알 수 있다.164) 孫禎睦,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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