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1910년대 한국의 공업 추세를 개관하면, 1910∼1919년 사이에 공장수는 12.6배, 자본금은 16.2배, 종업원수는 6배, 생산액은 24.4배 증대했다. 이들이 특히 1916년 이후에 급증하고 있는 것은 일제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본축적을 가속화하여 여유자금이 대거 한국으로 침투해왔기 때문이다.

 1910년대 한국의 공업은 정미업, 피혁 및 피혁제조업, 繰綿業 및 방적업, 요업, 금속공업(철공업·농구류), 제재업, 연초제조업, 농·수산물 가공업, 양조업, 제염업, 통조림업, 한천(우무)제조업 등 경공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업생산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낮았다. 공업생산액의 농업생산액에 대한 비율은 1917년 15.6%, 1919년 18.2%에 불과했다.165) 허수열,<조선인자본의 존재양태>(≪경제논집≫6, 충남대, 1990).

 1910년대 초에 한국에 침투한 일본인 공업은 정미업·양조업·조면업·방적업이 주된 것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방적업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육지면 재배를 장려하는 동시에 조면공장을 다수 설립했다. 1916년 현재 조면공장 17개, 자본금 1,171,000원, 원동력 582마력, 조면기 수 481대였고, 1917년 11월에는 부산에 조선방적주식회사(자본금 5백만 원)를 설립하였다. 1916년 이후 일본자본은 방적업·硬質製陶業·시멘트제조업·제철업·펄프업·양조업·연초·피혁·통조림·유리·성냥제조업·제당업 등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에서는 공업발흥의 제1차 파도가 넘실대기 시작했다.166) 허수열,<식민지 경제구조의 변화와 민족자본의 동향>(≪한국사≫14, 한길사, 1994).

 한국의 공업에서 일본인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선인 공업보다 월등히 높았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일본인 공업의 변화를 살펴보면, 공장수는 185개에서 1,125개로 약 6배, 자본금은 982만 6천 원에서 1억 4,022만 9천 원으로 약 14.25배, 종업원수는 10,613명에서 41,772명으로 3.9배, 또 생산액은 16,920원에서 154,100원으로 약 10배 증대되었다.167) 朴慶植, 앞의 책, 108∼109쪽. 한국인 공업도 그 절대수치에서는 크게 성장했지만, 일본인 공업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일본인 공업의 지배적 지위는 한·일 공업회사의 자본금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납입자본에서 한국인의 경우 1917년은 1911년에 비해 그 비율이 17.2%에서 12.3%로 감소했는 데 반해, 일본인 자본은 같은 기간에 31.8%에서 79.6%로 증대되었다. 여기에 합작 자본금을 덧붙이면 일본인 자본이 약 83%나 되었다. 또 1919년의 일본인 공장수는 929개, 한국인 공장수는 965개로 거의 같은 수였지만, 자본금은 한국인 공장이 758만 원인 데 비해 일본인 공장은 1억 1,751만 원으로 약 15.5배였다. 그밖에 종업원수는 3.5배, 생산액은 6.2배로서, 한국인 공업은 일본인 공업에 비해 영세성과 취약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업종별로 보면, 한국인 공업은 염직업·제지업·피혁제조업·요업·금속공업·토목업·製穀業·제분업·재봉업 등이 많고, 일본인 공업은 제사업·제면업·연초제조업·양조업·인쇄업·정련업·가스·전기업 등이 많았다. 제사업·제분업·통조림업·과자제조업 등에서 웬만한 것은 대부분 일본인 공업이었다. 한국인 공업의 경우, 공장수에서는 44.5%, 자본금액은 4.8%, 생산액은 8.5%인 데 비하여, 일본인 공업의 그것들은 각각 54.2%, 86.2%, 85.3%를 차지하고 있었다.168) 허수열, 앞의 글(1994).

 1916∼1919년에 한국에 침투해 온 일본인 대자본은 다음과 같았다. 三井系로서 조선방직주식회사·조선생사주식회사·남북면업주식회사·小野田세멘트주식회사 등, 三菱系로서 三菱제철주식회사·조선무연탄주식회사·西鮮중앙철도주식회사·東山농사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또 자본금은 적지만 西鮮조면공장·三邑주조주식회사·足立흑연·석면제련소, 합자회사 京谷상점(내화煉瓦) ·熱田상회·長津제일공장(전분)·城田정미소·조선물산주식회사(정미업)·조선성냥주식회사·조선정유주식회사·조선전분주식회사·片倉제사 대구공장 등이 설립되었다. 이밖에 전부터 있어 온 큰 회사로서는 조선제면주식회사·경성전기주식회사·동아연초주식회사·조선피혁주식회사·부산경질도기주식회사·조선우선주식회사·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 등이 있었다.169) 朴慶植, 앞의 책, 111∼114쪽.

 1919년의 일본인 공업회사를 보면, 회사수에서는 주조업·정미업·제재업이 많고, 자본금액에서는 방적업·주조업·제재업·도자기업·정미업의 순서로 많았다. 특히 정미업의 비중이 커서, 그 공장수가 전체의 23%, 생산액이 전체의 56%를 점하고 있었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인 자본이 지배적인 한국의 공업은 약간의 제철·광산업을 제외하고는 주로 방적업·주조업·정미업 및 농수산물가공업·경공업 등 원료 약탈과 관련되는 것이 많아, 식민지적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

 한국인 공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인 공장에 비해 규모가 차츰 영세해지는 데 반해, 일본인 공장은 점차 대규모화하여 가는 경향을 보였다. 1911년에 한국인 공장은 공장수에서 전체의 26%, 생산액에서 10%를 차지했는데, 1921년에는 공장수에서 46%, 생산액에서 15%를 차지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인 공장은 같은 기간에 공장수 6.8배, 생산액 8배 이상으로 증대하였다. 또 한 공장당 평균 생산액을 보면, 한국인 공장은 1911년에 3만 원에서 1921년에 1만 원으로 감소하고, 일본인 공장은 같은 해에 9만 1천 원에서 10만 9천 원으로 증대하였다.170) 全錫淡·崔潤圭,≪19世紀 後半期-日帝統治末期의 朝鮮社會經濟史≫(1959), 134∼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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