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8) 무역의 대일 종속

8) 무역의 대일 종속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기 이전부터 한국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즉, 1901년부터 러일전쟁까지만 보더라도 일본은 한국무역에서 수입의 62∼74%, 수출의 약 87∼78%를 차지했다. 또 한국의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의 80% 이상과 商館의 태반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무역을 통해 식량과 원료를 반입하는 한편 값싼 일본상품을 한국에 반출하였다. 특히 한국산 쌀을 반출하고 영국산·일본산 면제품을 반입하는 현상이 두러졌다. 이러한 식민지적 무역구조는 러일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일제는 한국강점 이후에도 1920년까지 대한제국의 관세제도를 부분적으로 존속시켰다. 그 이유는 일제가 구미 열강의 반발을 무마함과 동시에 한국무역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례를 들면, 한국강점 당시 수입액 중 영국제 면제품은 53%로서 일본제 면제품 47%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한국에서 정치적·경제적 지배기반을 확립하자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은 격감하여 1919년에는 일본제 면제품이 93%를 차지하게 되었다.182) 宋圭振,≪日帝下 朝鮮의 貿易政策과 植民地貿易構造≫(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1∼19쪽.

 한국강점 이후 무역액은 급증하였다. 특히 일본과의 무역액이 더 큰 폭으로 증가했다. 1910년의 수출액 중 외국은 453만 원, 일본은 1,538만 원이었는데, 1919년의 그것은 각각 2,210만 원, 1억 9,984만 원으로, 4,9배, 13배씩 증가했다. 한국의 무역총액에서 일본이 점하는 비율을 보면, 1910년에 수출이 77.2%, 수입이 63.7%였는데, 1919년에는 그것이 각각 90%, 65.3%로 되었다. 수출입 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76.1%이었다. 이로써 한국의 무역은 일본에 한층 더 종속되었다. 다음으로 한국의 상품종류별 수출입을 보면, 수출에서 식료粗製品(쌀·잡곡·수산물 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총수출액에서 이것의 비율은 1910년에 66.4%, 1919년에 67.8%였다. 식료조제품 가운데 곡물은 총수출액의 64.2%(1910년), 60.9%(1919년)를 차지하였다. 이 곡물은 반 이상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대일 곡물수출의 대부분은 쌀이었으며, 총수출액에 대한 비율은 1912년에 20.3%였던 것이 1919년에는 48%로 증대하였다.183) 朴慶植, 앞의 책, 120∼122쪽.

 일제는 자국내에서 쌀이 부족해짐에 따라 한국의 쌀을 값싸게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 결과 한국쌀은 일본 곡물시장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쌀의 대일 수출량은 매년 증가하여 1919년에는 생산량의 22%에 달했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1인당 미곡 소비량은 점차 감소되는 데 반해 일본인의 그것은 증가하여 한국인의 약 2배나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값싼 만주산 좁쌀을 수입해서 연명해야만 했다. 일제는 한국민중의 희생을 통해 식량 위기를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수출품 중 미곡 다음으로 많은 것은 공업원료 및 원료용 제품이었다. 이것들은 1910년에 19.8%, 1919년에 22.3%를 차지하였다. 繰綿·누에고치·소가죽 등 경공업원료와 중공업·군수공업에 필요한 철광·석탄 등 지하자원이 이것들이었다. 금·은도 대단히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금·은 수출액은 1910년에 712만 3,518원이었는데, 1916년에는 1,444만 9,558원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수입품을 보면, 완제품이 총수입액의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그 비율은 1910년에 56.3%, 1919년에 51.6%였다. 또 완제품 중 직물 및 경공업 일용품의 수입액은 1910년에 총수입의 46.6%, 1919년에 41.0%이고, 광물·철은 각각 5.5%·9.2%, 금속제품은 각각 3.6%·3.7%, 차량 및 선박은 각각 0.5%·3.3%, 기계류는 각각 4%·4.2%였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대부분은 일본산이었다. 총수입품 중 일본제품은 1910년에 59.3%, 1919년에 75.6%였다. 특히 직물·일용품 등은 1910년 64.4%, 1919년 85.6%를 차지하여, 한국은 일본 자본주의의 경공업제품 판매시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금속제품·차량·선박·기계류 등의 일본제품 비율은 1910년에 50.9%, 1919년에 61.5%였다. 이것은 일본의 중공업 발전이 약체임을 반영하는 동시에, 한국의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184) 宋圭振, 앞의 책, 27∼53쪽.

 1910년대의 한국무역은 국내시장의 발전에 어느 정도 촉진제 역할을 했지만, 일본인이 주로 상품유통을 장악하여 식민지적 기형성을 띠고 있었다. 수출부문에서는 일본으로의 편중화가 노골화되었던 반면, 수입부문에서는 특별관세제도의 시행으로 일본상품과 외국상품 특히 영국상품이 경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상품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제가 한국시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면서 공동판매와 독점판매 그리고 부등가교환 등을 통해 한국민중의 재화를 훑어가는 무역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鄭在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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