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2) 조선 총독의 권력

2) 조선 총독의 권력

 조선의 총독은 親任官이고 천황에 直隷하며 上奏權을 갖는다.211)<朝鮮總督府 官制>(칙령 제354호, 1910. 9. 30, 공포).
일본의 官等제도는 1886년 3월 제정된<高等官官等俸給令>(칙령 제6호)과<判任官官等俸給令>(칙령 제36호)에 의해 골격이 잡혀 1945년 패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선의 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은 모두 친임관이다(戰前期官僚制硏究會 編,≪戰前期日本官僚制の制度·組織·人事≫, 東京大學出版會, 1981).
총독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고 천황에게만 책임진다는 것을 뜻한다. 임기가 없음은 물론이다. 총독의 지위는 패망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대만총독이 천황에 직예하지 않았고 상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으로 충원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조선이 일본 군벌(특히 육군)의 지배영역으로서 대륙침략의 기지로 자리매겨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212) 森山茂德,<日本の朝鮮統治政策(1910∼1945)の政治史的硏究)>(≪法政理論≫23 ∼3·4, 新潟大學, 1991). 조선의 역대 총독 8명중에서 사이토 해군대장을 제외한 7명이 모두 육군인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오랫동안 단일독립국가를 유지하여 왔던 조선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일제는 군사력에 의하여 지배하여야 했다. 무관총독제는 원활한 군 통수를 통해 군사적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였다. 무단통치·헌병경찰제도 등이 이를 잘 설명하여 준다.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칙령>제386호(1919년 8월)를 공포하여 총독부 관제를 일부 개정하여 사이토(1914년 예비역에 편입되었는데 1919년 8월 현역으로 복귀)를 총독에 임명하였다. 지위에 관해서는, 종래<관제>제2조의 “총독은 친임으로 한다. 육해군 대장으로 이에 충원한다”라는 구절에서, “육해군대장 …”을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문관총독제로 관제를 개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문관도 총독에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을 적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실제로 한번도 문관이 총독에 임명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단지 민심수습을 위한 기만적인 진무책에 불과하였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육군군벌의 지배영역인 조선에 해군대장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일본내의 제 정치집단간의 권력투쟁과정 속에서 죠슈 육군벌의 퇴조와 정당정치의 활성화 및 해군세력의 부상이라는 정황과 맞물려 3·1운동에 대하여 육군 측에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213) 北岡伸一,≪日本陸軍と大陸政策≫(東京大學出版會, 1978). 그 이후 일본에서 육군세력이 다시 권력의 중추에 자리잡고 대륙침략 기운이 비등하면서 조선이 육군군벌의 독립적 지배영역으로 원상 복귀되어 모든 총독이 육군으로 충원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조선이 육군의 지배영역이었기 때문에, 총독은 일본 정치권력집단 및 육군내부 파벌의 역학관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수령으로 하여 가쓰라 다로·테라우치 마사타케·하세가와 요시미치·다나카 기이치·야마나시 한조 등으로 형성된 육군의 죠슈벌은214) 죠슈벌이라는 것은 메이지유신의 주도세력인 죠슈번(현재의 山口縣) 출신들을 가리킨다. 근대일본의 정치권력은 伊藤博文·山縣有朋를 위시한 죠슈번 출신들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었는데, 그 내부에서도 이토 등의 文民 정치세력과 야마가타 등의 군벌정치세력으로 나누어져 권력을 분점·공유하였다(강창일, 앞의 글, 1994). 메이지·다이쇼기에 걸쳐 육군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근대 일본의 정치권력을 이토 히로부미 등의 문민정치가 및 정당세력과 함께 분점하여 공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이들 죠슈벌의 핵심들이 조선총독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 육군 내부의 세대교체로 죠슈벌이 해체되면서 이 군벌의 방계로 성장하여 온 우가키가 육군 본류의 실력자로 등장하여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우가키-미나미(宇垣-南) 계보가 그것이다.215) ‘宇垣-南’ 계보의 인적 구성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北岡伸一,<陸軍派閥對立>(1931∼35)の再檢討-對外·國防政策を中心として->(≪年報·近代日本硏究 1, 昭和期の軍部≫, 山川出版社, 1979).
佐佐木隆,<陸軍革新派の展開>, 앞의 책.
1930년대에 들어와서 육군 내부에서 극우적인 皇道派가 등장하여 ‘국가개조’를 주창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근대적인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는 統制派가 등장하여 권력투쟁을 벌이고 여기에서 통제파가 승리하였고 이 집단이 육군은 물론 정치권력까지 장악하여 침략전쟁을 일으켰음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우가키-미나미 파벌은 육군 내부에서 주류로 잠시 자리를 잡는 것 같았으나 얼마 안 있어 비주류로 전락하게 된다. 우가키가 총리대신의 대명(천황의 명령)을 받고서도 육군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1930년대 이후 이 파벌은 군부 및 중앙정치에서는 밀렸지만. 그 대신에 조선을 그들의 지배영역으로 하여 패전 때까지 조선총독은 이 계보에서 충원되었다.216) 최근에,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총독의 성격에 접근하는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승렬,<역대 조선총독과 일본군벌>(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24, 1994).
일본의 전형적인 권력분점의 정치현상이라 하겠다.

 조선총독은 일본의 수상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위를 향유하였다. 그들은 모두 백작·남작이라는 최고의 작위를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9명의 총독 중 수상을 지낸 자들이 테라우치·사이토·우가키(천황의 하명을 받았으나 육군 군부 내의 갈등으로 정식으로 취임하지 못했음)·고이소(小磯)·아베(阿部) 등이었고 그 외의 자들도 이미 대신을 지냈던 자들이었다. 그 지위는 宮中席次에도 잘 나타난다. 궁중석차는 제1계에서 제10계까지 지위 순에 따라 나누어지고 있는데 조선총독은 최고 상계인 제1계에 자리잡고 있다(대만 총독인 경우에는 명시조차 되지 않았다). 제1계 중에서도 외지의 총독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元帥·대신의 다음 석차인 제6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전 수상·추밀원 의장(제7위)·추밀원 부의장(제9위)·친임관(11위)·귀족원 의장·중의원 의장(제12위) 등보다도 상위로 가히 그 위상을 추량할 수가 있다.217) 黃昭堂,≪臺灣總督府≫(東京;敎育社, 1981), 209∼210쪽.

 총독은 일본국 헌법이나 법률에 구애받음이 없이 조선지배에 관한 한 입법권·행정권·사법권·군통수권 등 일체의 권력을 독차지하여 조선을 통치하였다. 우선 입법권에 대하여 살펴보면,<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법률>(<긴급칙령>제324호, 1910. 8. 29)에서 천황의 ‘명령’인 칙령과 천황에게만 책임지는 총독의 제령에 의하여 조선을 통치하도록 하고 있다.218) 천황의 통치대권에 속하는 칙령으로 총독에게 입법권을 위임할 수 있는가 하는 법리적 문제가 제27회 제국의회에서 논란이 되어, 결국<일본법률>제30호(1911. 3. 25, 공포)로 총독에게 위임입법권이 부여되었다(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日本統治時代の朝鮮≫, 52∼59쪽). 일본 국내에서 시행되는 칙령은 하위법으로 법률을 변경할 수 없고 제국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의 ‘명령’인 制令은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본국에서조차도 “내각총리대신을 거쳐”라는 절차만이 있을 뿐 내각이나 의회의 승인이나 견제를 받음이 없이 오로지 천황의 재가만을 필요로 할 뿐이었다.

 조선총독은 의회의 견제나 내각의 지휘·감독을 일체 받음이 없이 관리의 임면권 및 행정권 일체를 장악하였다. 대만이 행정권에 있어서는 일본수상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나서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자 효율적인 전시동원을 위하여 ‘행정간소화 및 내외지 행정일원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는 조선총독이 일본내각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하는 것으로 총독의 권한이 제약당하는 것을 뜻하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시중의 비상조치였음에 지나지 않는다.219) 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 위의 책, 171∼175쪽.

 조선총독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육해군의 통수권을 장악하였다. 조선에는 통감부 설치 이후, 항일투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두어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병합 후에는 조선주차군 사령부로, 1918년 5월 29일에는 조선군 사령부로 개칭함).220) 朝鮮軍司令部,≪朝鮮軍槪要史≫(宮田節子 編,≪朝鮮軍槪要史≫, 復刻版, 不二出版社, 1989).

 통감부<관제>제4조에는,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한국주차군의 사령관에 대해 병력의 사용을 명할 수 있다”라고 정하였다. 이것은 군정권 및 군교육권은 육해군 당국에 있지만 軍令權 즉 군통수권은 통감이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 스스로도 자의적으로 ‘조선방비’가 아닌 ‘치안유지’ 등에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221)<朝鮮駐箚軍司令部條例>(칙령 제205호, 1906. 8), 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 앞의 책, 233쪽. 이는 군대가 조선의 ‘치안유지’ 기구임을 뜻한다. 그래서 한국주차헌병대도 통감의 예하에 배속시키고 동 사령관을 경무총감에 겸임시켰던 것이다.222)<韓國に駐箚する憲兵に關する件>(칙령 제323호, 1907. 10. 8). 치안유지라는 미명하에 헌병대를 포함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한 폭력지배의 제도적 장치는 병합 이후 계승·강화되어 이른바 헌병경찰제로 상징되는 무단통치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수상이 내각수반임에도 불구하고 군사권에 관한 한 어떠한 권한도 갖고 있지 못한 채, 군은 천황에 직예하는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조선총독이 행정권과 입법권뿐만 아니라 군통수권까지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 민족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치열함에 대응한 것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통제체제를 구축하여 통치하여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마지못해 관제를 개정하여 군통수권을 폐지하고 출병요구권만을 부여하였다. 이를 가지고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실제 이 개정의 의도는 해군총독과 육군인 조선군사령관과의 미묘한 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앞에서 언급한 조선군의 ‘치안유지’ 기능과 역할은 규정의 개정 없이 줄곧 계속되었고, 1930년대 대륙침략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어갔다.

 조선총독은 재판소 구성권·관리권·인사권과 감독권 등 일체의 사법권을 장악하였다.223)<조선총독부 관제>(칙령 제354호)·<조선총독부 재판소령>(제령 제15호). 사법권의 독립은 입법부 및 행정부로부터 사법부를 독립시키는 것과 함께 신분보장 등을 통한 법관의 독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충량한 제국신민’이 아니면 언제든지 퇴직시킬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어 신분조차도 보장하지 않았다(일본 국내에서는 법관은 법률로써 신분보장을 받고 있음). 그리고 재판소는 총독부 통치기구의 한 부서로 편제되었고 집행권에 해당하는 검찰권을 사법권 속에 포함시켰다. 재판권과 집행권을 독립시켜 권력집중으로 인한 권력남용과 악용을 방지하여 기본권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사법권 독립의 목적에 상치되는 것으로 근대적 사법제도와는 거리가 먼, 전제군주제하의 그것과 흡사하다.

 입법·사법·행정·군통수권을 비롯한 통치권 일체를 한 몸에 지닌 조선총독은 전제군주적인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화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총독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에서도 천황에게만 책임을 질 뿐, 내각이나 의회로부터도 통치권 행사에 관한 한 간섭이나 견제를 당하지 않는 존재였다.

 일제의 식민지 관리(사무통리)기구는 외무성(1905∼1910. 5), 拓殖局(∼1913. 6), 내무성(∼1917. 7), 척식사무국(∼1922. 12), 척식국(∼1929. 6), 척무성(∼1942. 11), 내무성(∼패전)이었다.224) 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第六節) 朝鮮統治の中央機構>(앞의 책). 이 기구들은 ‘천황 혹은 총리대신을 보필’하고 본국과 식민지간의 연락창구의 기능과 역할만을 할 뿐으로 그 자체가 식민지 통치권력의 상급기관이라든지 감독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대만총독부의 경우는 그 관제에 “총리대신의 감독을 받고 제반의 정무를 통리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본국과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그런데 조선총독의 경우는 “총독은 천황에 직예하고 … 제반의 정무를 통할하며 내각총리대신(전담의 省이 설치되었을 때는 拓務大巨 혹은 內務大臣)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는다”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본국과의 관계가 상주의 절차만을 가지고 이처럼 모호하게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 해석이 분분하였고 줄곧 논란이 되어 왔다. 그것은 총리대신(혹은 척식성·내무성)에 감독권이 있는가, 조선총독의 지위가 척식성 혹은 내무성 대신의 아래에 놓이는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결국에는 본국의 식민지 관리기구에 조선에 관한 한 감독권이 없는 것으로 결착되었다.225) 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 위의 책, 47쪽. 그 이전 1917년에도 내무성에서 조선총독부에 대한 감독권을 주장하여 훈령을 내렸는데, 총독부에서 근거 없다고 이를 반려하여 문제가 되었으나 결국 총독부의 입장이 관철되었다(위의 책, 160∼161쪽).

 1942년 ‘내외지 행정일원화’ 조치로 인하여 조선총독은 각 성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행정의 일원화와 일관성을 통하여 전시동원체제를 효율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비상조치였다. 그럼에도 본국의 각 성에 개별적인 행정감독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을 뿐으로 일반적 행정감독권은 여전히 조선총독에게 있었다. 이 조치로 조선총독의 전제적 권력행사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으나, 천황에 직예하는 최고의 행정관청으로서의 지위와 권력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총독은 기본적으로 천황 이외에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견제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입법권·행정권·사법권 등 조선통치에 관한 일체의 권력을 장악하는 전제군주적 존재였다. 이처럼 배타적으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총독의 자리는 현역 군인대장 혹은 그 출신자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민족적 저항을 억누르면서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권력집중과 군사적 지배를 통하여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고 강권통치를 해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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