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3) 식민지 통치구조

3) 식민지 통치구조

 일제는 병합 직전 廟議에서<병합의 기본방책>을 정하여 조선을 일본의 헌법이나 법률을 적용하지 않고 천황의 대권에 의해 통치되는 지역인 法域外지역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서는 천황의 통치대권에 해당하는 긴급칙령(제324호)<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조선통치법의 대강을 그려놓았다. 이에 의하면, 헌법에 해당하는 최상위법은 천황의 명령인 칙령으로 대체하고 총독에게 입법권을 위임하여 그 명령인 제령을 통하여 조선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법률을 조선에 적용할 때에도 이를 칙령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결국 칙령·제령·부령·도령이라고 하는 통치기관의 명령체계 아래 통치되었다. 이러한 ‘명령’에 의한 통치구조는 주민의 의사가 입법과정에 반영되는 제도적 장치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민지 본국에서조차 견제받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일제가 ‘자기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반법치주의적인 人治主義 통치체제를 구축한 것을 뜻한다.

 일제는 이러한 ‘명령’에 의한 인치 지배의 권력전횡을 은폐하기 위하여, 의사자문제와 의사의회제를 채택하였다. 중추원과 도평의회·부회·읍면회 등 그들이 소위 ‘자치제’라고 선전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자마자 중앙행정기구내에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을 설치하였다. 관제상의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총독이 의원을 임명하고, 의원은 신분보장이 되어 있지 않아 총독이 언제라도 해임할 수가 있으며, 자문사항조차 법령으로 정하지 않아 총독이 자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226) 중추원의 구성과 업무에 대해서는,<朝鮮總督府 中樞院 官制>(칙령 제355호, 1917. 9. 30).

 또한 1913년<부제>(제령 제7호)를 공포하여 부윤의 자문기관으로 부협의회를 설치하였다. 1920년에는<부제>(제령 제12호)와<면제>(제령 제13호)의 개정을 행하고<도 지방비령>(제령 제15호)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이를 통하여 도의 자문기관으로 도평의회를, 면(지정면)의 자문기관으로 면협의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부의원은 선출직으로, 그 외 협의회원은 임명직으로 하였다. 이들 지방의 자문기관은 각 지방단체의 세출입과 起債·지방세·사용료 등 부과세에 대한 사항만을 자문하도록 되어있다.

 그 후 1930년 12월 1일 도제, 부제 및 면제의 개정을 행하였다. 여기에서 우선 도평의회를 도회로 바꾸어 의결기관으로 하면서 3분의 1은 도지사의 임명에 의해, 3분의 2는 부회의원·읍회의원·면협의회 회원의 간접선거에 의해 구성하였다(1934년에 시행). 그리고 부회 및 읍(종래의 지정면)회를 의결기관으로 하고 면(지정면 이외의 면)협의회를 자문기관으로 각각 설치하였다(1931년에 시행).

 이러한 각각의 지방의회는, ①중요한 사항을 의결하고, ②공익에 관한 의견서를 관계관청에 제출하고, ③관청의 자문에 답신하고, ④예·결산을 심의하고 검사하는 권한 등을 갖고 있었다.227) 日本外務省 條約局 法規課, 앞의 책, 212쪽. 그 전의 자문기관보다는 질적·양적으로 훨씬 큰 권한을 향유하고 있었으나, 당시 그들이 선전하고 있는 바처럼 ‘중앙집권적 통치방침을 고쳐 지방분권의 실현’을 위한 것이라든지 ‘지방자치제도의 創定’228) 朝鮮總督府,≪施政に關する諭告, 訓示竝演述≫(1930).은 결코 아니었다.

 자치입법권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조차도 지방단체장이 자의적으로 그 의결을 취소할 수 있다. 조선총독은 도회나 부회 등을 마음대로 해산시킬 수도 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인 지방세 5원 이상 납부자에게만 부여하는 제한선거제였는데, 이는 조선 거주 일본인을 의회에 진출시키기 위한 자의적 획정이었다.

 또한 읍·면의 행정단위를 일본인 거주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의적으로 정하여 읍에는 의회를 설치한 반면 일본인이 별로 거주하지 않는 면에는 자문기관인 협의회만을 두었다. 아울러 도회의 경우에도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할 위험성 때문에 간접선거제 및 임명제를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제령>을 공포하고 나서도 2년이나 뒤늦게 시행하였다.229) 孫禎睦, 앞의 책.

 이상과 같이 자문기관, 의결기관을 형식으로는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는 의사적이고 허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본질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인의 정치적 지배계급화 및 조선인 상층계층의 개량화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치권력의 ‘명령’에 의해 지배되는 반법치적 인치주의는 통치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앙에는 총독의 최고 보좌관으로 정무총감(친임관)을 두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총독과 진퇴를 같이하였다. 정무총감 밑에 총독의 명령을 집행하는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의 일반 부서를 두었고 이 부서는 정황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그리고 총독에 직속하는 특별기구로 경무총감부·재판소 등을 설치하였다.

 지방에는 총독에게 직예하는 道長官(1919. 8. 29,<칙령>제391호에 의해 도지사로 개칭됨)을 두었는데 도장관은 지방통치에 관한 한 입법·행정·사법권을 전유하고 해당 지방의 주둔군의 출병요구권도 갖는 ‘가히 小총독’이라 할 만한 지위와 권한을 장악하였다. 초기 헌병경찰제도하에서 각 도의 경무부는 도장관에서 독립하여 중앙의 경무총감의 관할하에 놓였다. 이것은 1910년대에 지방장관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이를 일본인 경무부장이 견제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1920년 관제개정으로 보통경찰제가 실시되면서 도 경무부는 도지사의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 도지사가 경찰권도 완전히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도장관 밑에 최말단의 통치기구(법령으로 규정된 공법인의 지방단체)로서 부와 군을 두었고 그 밑에 보조집행기구로 면을 두었다. 그러다가 1930년의 지방관제 개정을 통하여 읍·면을 공법인의 최하위 지방단체로 규정하게 됨에 따라 읍·면→부·군→도→총독의 위계체계가 확립되었다. 읍·면이 공법인화된 지방단체로 되었다는 것은 식민지 통치권력이 최하위의 면단위까지 침투하여 식민지 지배체제가 그만큼 공고히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 각각의 지방통치의 수장들은 총독의 조선에서의 지위와 권한처럼, 해당 통치영역에서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적 존재였고 상급 권력에게만 책임질 뿐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통치기구를 두고서 경찰력과 군사력을 행사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자기목적’을 실현하여 나갔다. 일본의 조선지배에서 경찰이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경찰 수와 예산만을 살펴보더라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전체관리수의 절반 이상을 경찰인원이 점하고 있고 보통경찰제가 채용된 이후에도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단, 1940년 통계에서는 경찰관의 비중이 5분의 1 정도로 떨어지고 있으나 이는 전시강제동원에 군이 직접 그 동원기구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증원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총독부 직원은 물론, 경찰에 일본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경찰은 치안 및 위생의 일반업무 외에 위임된 범위내에서 사법재판권과 집행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검사가 없는 지역에서의 검찰사무, 민사쟁송 조정사무(<제령>제11호, 1910), 집달리사무, 범죄즉결례(<제령>제10호, 1910. 12) 및 경찰범 처벌규칙(<부령>제140호, 1912. 3)에 의한 사법재판권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학사·경제·보건·언론·종교 모든 분야에 걸쳐 지도·감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기관의 고유업무에까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230) 경찰의 업무와 기능에 대해서는 金敏喆,<日帝 植民支配下 朝鮮警察史 硏究>(경희대 석사학위논문, 1994). 이처럼 경찰의 無所不爲의 권능은 경찰 지배체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헌병경찰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은 조선통치를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였다. 조선주둔군은 그<조례>에, “한국(후에 조선)의 안녕 질서를 보지하기 위해 통감(후에 총독)의 명이 있을 때는 병력을 사용할 수가 있다. 단, 일이 급할 경우에는 편의상 이를 처리하고 나서 통감에 보고해야 한다. 전항의 경우에는 바로 육군대신 및 참모총장에게 보고해야 한다”231)<朝鮮駐箚軍司令部條例>(칙령 제 205호, 1906. 8).라고 되어 있다. 이 조례는 그 후 계속 적용되었고, 조선주차군(후에 조선군사령부로 개칭)의 기본업무로서 ‘대외 및 대내경비’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조선군이 ‘국토방비’라는 본래의 업무 외에 조선의 치안유지도 기본업무로 부여받고 있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조선군이 독자적 판단 아래 자의적으로 조선 내의 치안유지에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상에서처럼 군은 ‘안녕·질서유지’라는 명목 아래 군사력이라는 물리력을 가지고 경찰과 함께 조선통치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이 끝나자 1907년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바꾸면서 조선에 1개 사단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러다가 1910년 병합을 전후하여서는 2개 사단으로 병력을 증강하였다가 어느 정도 민족적 저항에 대한 무력진압이 끝나자 1개 사단으로 감축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는 다시 2개 사단으로 증강하기로 하여 1918년 이후부터는 2개 사단(제19사단과 제20사단)이 상주하게 되었다. 만주의 국경지대에 ‘대외경비’의 목적으로 1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대내경비’를 목적으로 서울 용산에 사단사령부를 두고서 대구·부산·광주·대전 등 주요 도시에 각 부대를 주둔시켰다. 그 주둔군은 해당 지역에서 대민 정보수집을 할 뿐만이 아니라 통제와 감시를 주 업무로 하였다. 그리고 3·1독립운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군사력을 빈번히 사용하였다.232) 조선군사령부, 앞의 책.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나서 조선이 물적·인적 자원의 보급지로 자리 매겨져 전시 강제동원체제가 구축되면서 군이 조선통치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총독부 및 지방관서에 협조와 연락의 명목으로 군에서 요원을 파견하는가 하면, 모든 정책결정과정에도 직접 참여하여 주도하였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1938. 7)·국민총력 조선연맹(1940. 10)은 군·관·민 삼위일체의 전시동원기구로서 여기에서는 군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군사통치적 양상은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될수록 심화되어간다. 중일전쟁 이후를 전시 강제동원을 위한 군사통치기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이와 같은 군사력과 경찰력에 의한 강권통치와 계급적인 식민지 관료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민족의 저항이 그만큼 강고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물리적인 강압통치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조선은 지배할 수 없다고 하는 그들의 한계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민족말살정책, 곧 ‘조선’을 신속히 효율적으로 해체시켜 일본의 천황제체제의 최말단 피지배계급으로 편입시키려는 일본형 식민주의의 정책적 반영이던 것이다.

<姜昌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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