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1) 배경

 1910년대는 일제 식민통치라는 전혀 새로운 현실적인 여건하에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아야 하는 민족문제해결이 최급선무로 인식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민족운동방략을 반성하고 문제점들을 검토한 위에 폭압적인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대항할 수 있는 민족운동체제를 재정비하고 독립쟁취를 위한 새로운 운동방략 정립과 구현을 위한 기반구축이 필수적이었다. 이같이 철저한 반성과 재정립단계의 준비과정을 통과한 까닭에 1919년의 3·1운동이 전민족적인 항일투쟁으로 확대·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1910년대의 민족운동이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가늠케 해준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직후 역사상 전례없는 폭압적 식민무단통치를 감행하였으니, 한국인은 일체의 민족적, 정치적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헌병·경찰을 비롯한 거미줄같은 감시체제하에 갇히게 되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민족운동을 위한 조직결성은 물론 운동체제의 재정비나 활동전개는 결코 쉽지 않았으며, 대체로 사전발각으로 운동자체가 축소되거나 은폐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제약이 많았던 시기였다.

 제반 여건의 어려움 속에서도 1910년대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투쟁이 비밀결사체의 조직원이 체포되었거나 조직이 해체당한 후에도 간단없이 이어졌다. 이같은 조직력과 투쟁력을 기반으로 한 까닭에 3·1운동이 단기간에 전국적, 전민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1910년대 국내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의 구체적 실상과 그 특징을 규명하는 과제를 통해 민족운동사란 커다란 흐름 속에서 한국민족운동의 분수령이라고 하는 3·1운동과 더불어 1910년대 민족운동 특히 국내민족운동의 역사적 위치가 올바르게 자리매김될 것이다.

 1910년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각지에서 지속되는 한국민의 저항을 근절시키고 식민지 조선지배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專制的 軍國統治體制인 武斷統治란 식민지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의 핵심 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총지휘자인 총독을 두어 통치를 담당케 하였다. 그런데 조선총독은 일본관제내에서 최고의 親任官으로 일본 조선 주둔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며, 일본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천황 직속직으로 육해군을 통솔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총독은 조선에서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통수권을 지님으로써 식민지 한국의 정권과 병권 등 모든 권력을 가진 “독립된 왕국의 土皇帝”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233) 朴慶植,≪日本 帝國主義의 朝鮮支配≫(청아출판사, 1986), 42쪽.
게다가 총독은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권한으로 총독의 법률효과를 가진 명령을 특별히<制令>이라 하였다(朝鮮總督府,≪朝鮮法令輯覽≫上).
이렇게 일제는 총독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식민통치의 무단성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총독부의 관료행정기구는 다양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된 식민지 민중의 억압과 수탈을 수행하는 물리적 폭력기구나 다름없었다.234) 1914년에 실시된 지방행정 정리조처로 인해 민족내의 관료적 친일집단의 재생산구조가 형성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참여한 관료들의 경우 3·1운동시기 투쟁에 적극 가담한 이도 적지 않지만 3·1운동 이후에는 거의 지배구조에 기생하는 매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재희,<일제 초기 식민지 국가기구의 형성과 그 성격>(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3·1민족해방운동연구≫, 청년사, 1989), 92쪽.

 또한 안정된 식민지배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행정조직의 체계화와 함께 상비적인 무장폭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시책에 부응키 위해 마련된 장치가 헌병경찰제도와 군대였다. 헌병은 그 임무가 첩보수집·의병토벌·검사사무대리·범죄의 즉결을 비롯해 민사소송조정·집달리업무·산림감시·어업단속·징세원조·묘지의 단속·노동자단속 그 밖에 일본어보급·농사개량업무까지 관여하여 지방에서는 완전히 조선민중의 生死與奪을 관장하는 無所不爲의 권한을 행사하였다.235) 朴慶植, 앞의 책, 44쪽. 특히 고등경찰은 조선 내의 사찰·정보 업무 이외에 만주·노령·중국·미주 등지에까지 그 손길을 미쳤다. 더구나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해 헌병경찰에게 범죄즉결권을 비롯한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여 벌금·태형·구류등의 형을 부과·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일제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헌병경찰을 전국 각지에 빈틈없이 배치하여 한국인의 동향을 감시케 하였다. 즉 총독부의 식민통치는 강제와 폭력에 기반을 두었던 것인 만큼 한국민중의 저항이 존재하는 한 헌병경찰의 수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236) 朴慶植, 위의 책, 46쪽.
점령 직후인 1910년 헌병기관은 653개소, 인원은 2,019명 경찰관서는 481개소, 인원수가 5,881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헌병기관 953개소, 인원 7,749명, 그리고 경찰기관 678개소, 인원 6,222명으로 급증하였으며, 3·1운동 발발 전인 1918년에는 헌병기관 1,048개소 인원 8,054명 경찰기관 738개소 인원 6,287명으로 증가하였다. 헌병·경찰기관의 수를 비교해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헌병경찰의 비중이 일반경찰보다 커져 1910년 경찰 74.4명 대 헌병 25.6명이던 것이 1911년에는 경찰 44.5명 대 헌병 55.5명의 비율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조재희, 앞의 글, 91쪽).

 일제는 이같은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가진 헌병경찰과 조선총독부만으로도 부족하여 이를 무력으로 뒷받침하고자 전국의 요소요소에 일본정규군을 배치하였다. 朝鮮駐箚軍이 러일전쟁 이래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는데 강점 이후에는 일본육군 제19사단을 나남에 주둔시켜 북부지역를 관장케 하고 제20사단을 용산에 주둔시켜 중부와 남부지역을 관장케 하니 각각 그 지역의 주요도시에 연대병력 혹은 대대병력을 주둔시켰다. 이어 경상남도 진해와 함경남도 영흥만에 해군요새사령부를 설치하여 군사적으로도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헌병경찰과 군대배치 외에 헌병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의무소방대가 조직되었으며, 총독부 관리 이하 소학교 교원에 이르기까지 칼을 차게 하여 전 민중을 총칼의 武力으로 위협하는 식민통치를 감행하였다.

 이와 같은 물리적인 통제를 바탕으로 일제는 민족운동을 강력히 근절코자 획책하였던 것이다. 특히 1905년 이래 전국에서 봉기하여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고조되어 가던 의병전쟁에 대해서는 강점 이전인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자행되었다. 일본정규군에 의한 ‘남한대토벌작전’이 있었는데 이 토벌작전은 병합을 앞두고 의병활동을 근절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의병 ‘토벌’을 빙자하여 일반민간에 대해서도 철저히 탄압하였고 이 작전을 통해 전국을 공포분위기로 몰아 넣어 식민지지배의 기초를 구축해 나갔다.237) 강만길,≪고쳐쓴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 1994), 23쪽.

 또한 정치활동은 물론 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도 완전 박탈하였으니, 1910년 8월 25일<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일체의 정치결사·집회를 금지시켜고 9월 대한협회·서북학회·진보당·일진회 등 모든 계몽운동단체의 강제해산을 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7년<신문지법>, 1909년<출판법>을 공포하여 출판의 자유도 억압하여≪초등대한역사≫·≪동국역사≫등의 역사서,≪이순신전≫·≪프랑스혁명사≫등의 서적을 폐간, 발매금지 혹은 압수하였으며,≪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등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모든 신문도 폐간조치하였다. 단지≪京城日報≫·≪매일신보≫·≪서울프레스≫등 총독부 대변지인 어용신문만 남겨 모든 여론조작의 전위역할을 담당케 하여 완전 통제하에 두었다.

 조선총독부는 또한 대한제국 시기에 왕성했던 근대적 민족교육에 대한 열기를 철저히 탄압했다. 통감부시기에 이미 각종<학교령>을 만들어 학제를 개악하는 한편 관공립학교를 증설하여 일본인 교사을 배치하고 친일교육·일본어교육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어 1908년 8월<사립학교령>·<서당에 관한 훈령>을 공포해 서당과 사립학교의 설립 및 민족교육에 대한 통제를 가능케 하였다. 이 때문에 1909년 6월 말까지 인가를 출원한 1995개교 중 인가된 학교는 겨우 820개였다. 그것도 종교계 학교가 대부분이고 민족계 학교는 42개에 불과했다. 1908년 당시 전체 사립학교가 약 5천개였으나,<사립학교령>이 적용된 후인 1910년 8월에는 1900여 개 교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다.238) 朴慶植, 앞의 책, 143쪽.

 일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강제하기 위한 조치를 서둘러 실시하여 우선 1911년 8월<朝鮮敎育令>, 이어<사립학교규칙>을 제정·공포하여 국권회복운동의 구심점이던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한편 교육내용도 강제로 개편시겨 갔다. 이에 따라 사립학교 수는 3·1운동 직전에는 742개 교로 줄어들었고 학생 수도 반으로 감소되었다. 강력한 법적제제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의 민족교육은 독립운동의 기초정립이나 민족적 역량증대에 기여한 바 적지 않아 사립학교 혹은 그 학생들이 3·1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239) 趙東杰,<1910년대 獨立運動의 變遷과 特性>(≪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 378쪽.

 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자 오히려 서당교육이 신장되어 서당 수가 1911년 16,540개소 학동수가 141,604명에서 1917년 24,294개소, 학동 264,835명으로 급증하였다. 이 시기의 서당은 전통교육이나 봉건교육 일색이 아니라 외형상의 서당에서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항일교육이 가능하여 민족교육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당교육의 신장세에 당황한 일제는 서당교육을 통제하고자 1918년<書堂規則>을 발동하여 서당의 설치억제와 교과과정에 대한 간섭 강화를 통해 민족교육을 봉쇄했던 것이다.240) 趙東杰, 위의 글, 382쪽.

 식민지 시기 전기간을 통해 일제의 교육정책은 문명적인 교육보급이란 명목하에 민족말살을 목표한 것이었으므로 이 시기 공교육으로서의 학교교육은 군신일체의 충효사상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은 식량·공업원료의 약탈 및 상품판매시장으로서의 식민지적 경제로 재편성하는 방침이 그 특징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적 침략은 먼저 농업부문에서 이루어졌는데 1910년대는 그 기초 정지작업으로서의 토지약탈과 지세수탈을 위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감행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에는<토지조사령>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9년이란 긴 세월과 2,456만 원의 거액을 투입하여 1918년 11월에 완료되었다.241) 토지조사사업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 ‘수탈론’ 논쟁과 관련지어 대립적인 주장들이 제기되면서 재검토작업이 활발해졌다. 주요논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신용하,≪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한국연구원, 1979).
宮嶋博史,≪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東京大 東洋文化史硏究所, 1991).
장시원,≪일제하 대지주의 존재형태에 관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9).
조석곤,≪조선토지조사사업에 있어서의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와 지세제도의 확립≫(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5).
김홍식 외,≪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 1997).
최원규,<한말, 일제초기의 토지조사사업연구와 문제점>(≪역사와 현실≫21, 1999).

 토지조사사업은 일본인, 일인기관의 소유 농토를 많게 하며 토지에 대한 자본제적 배타적 소유권을 수립하는 한편, 일본 농촌을 대신해 식량공급지화하여 쌀생산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고주의의 약탈적인 방법으로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약 1,369만여 정보와 미개간지 약 102만 정보, 농경지 13만 정보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 면적 약 2,225만여 정보의 약 62%에 해당하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신고하지 않거나 신고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다 갖추지 못한 한국농민의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이 사업을 통해 종래 농민의 권리였던 관습상의 경작권·賭地權·개간권·入會權 등을 부정하고 소멸시켰다. 즉 소유권의 귀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농민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이 사업을 지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해 조선 후기 이래로 다양한 방법으로 증진되어 왔던 농민들의 권리를 소작권 부정이란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지세 산정과정에서 50%란 고율 소작료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식민지 지주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130여 만 정보의 국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었으며 이를 동양척식회사 및 일인들에게 헐값으로 또는 무상으로 넘겨 주어 일인이나 동척 같은 토지회사의 토지소유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242) 신용하, 위의 책, 246쪽. 즉 동척의 토지소유가 1910년 11,035정보이던 것이 1914년 70,144정보, 1919년에는 78,520정보로 증가하여 대부분이 조선인 소작농으로 구성되는 반국가적·식민지적·반봉건적인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243) 朴慶植, 앞의 책, 77∼78쪽. 그 결과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유권이 확정되면서 지세수입도 급증하여 식민지지배의 재정적 뒷받침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244) 과세지는 52% 증가하였고 지세 징수액은 1911년 6,245,000여 원에서 1920년 11,157,000여 원으로 약 2배가 증가하였다.

 일제는 토지약탈과 함께 산림도 약탈하고자 하여 우선 1908년<삼림법>을 제정·공포하고 임야소유자로 하여금 지적과 면적도를 첨부해 신고케 하되 기한내에 신고하지 않거나 증거불충분한 것은 국유·민유의 구분에 의해 대부분의 임야를 국유화하였다. 1911년 기창출된 국유림을 보다 효과적으로 정리·경영하기 위하여<산림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1912년 8월<조선국유산림미간지 및 삼림산물특별처분령>을 공포하여 일인에게 국유림과 그 임산물을 수시 불하하는 길을 열었다. 그 결과 일인에 대한 국유림의 대부 및 불하가 대대적으로 행해졌고 이들에 의한 산림소유의 확대가 점증하였다. 반면에 조선민중은 그대로 무주공산에 입산하여 薪炭과 採草를 거두는 입회권까지 박탈당하였다. 또한 일인사업가에게 경영상 안전을 보장하고 보다 계획적인 국유림경영을 확립하고자 1917년 조선임야조사사업을 계획·실시하여 조선임야의 소유권확립과 그 이전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적 임야소유관계로의 재편성을 시도하였다.245) 강영심,<日帝下 ‘朝鮮林野調査事業’에 관한 硏究>(≪韓國學報≫33·34, 1984).
---,≪일제의 한국삼림수탈과 한국인의 저항≫(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8).

 또한 일제는 일본공업발전의 원료공급지와 독점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한 경제체제개편에 착수하였다. 우선 1910년 12월<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총독의 허가 없이는 회사를 설립할 수 없고 ‘총독의 명령’·‘공공질서’·‘선량한 풍속’에 反하는 경우 회사의 정지·금지·폐쇄 및 해산시킬 수 있도록 하여 조선인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막고자 하였다.<회사령>공포는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일본자본의 적극적 진출을 꾀해 한국을 상품시장화하는 동시에 한국산업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 실제 1918년까지 한국인회사의 경우 63개를 허가한 데에 반해 일인회사는 289개가 설립허가를 받았다는 통계상의 수치로도 민족산업의 탄압실상을 간파할 수 있다. 또한 1915년 12월<조선광업령>을 제정·공포하여 광업독점권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광업권의 등록제를 통하여 광산인가에 있어서 일인에게 우선권을 주어 일인에 의한 광산업독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심지어 어업부문에서도 어업면허·허가제를 도입하여 한국인 소유의 유망한 어장과 왕실소유의 어장은 일인에 의해 약탈당하고 어장구역을 일인이 독점할 수 있게 재편성하였다.

 이처럼 물리적 폭력은 물론, 경제적 침탈을 위한 기초정지작업을 목표한 1910년대 무단통치로 인해 한국민은 일체의 민족적·정치적·경제적 권리는 물론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박탈당한 채 식민통치에 복종해야 하는 노예적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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