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4) 미주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하와이와 미 본토의 항일운동단체 중 가장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단체는 共立協會였다. 그러나 미주라는 지역의 원거리성은 국권회복의 수행거점으로는 걸림돌이었다. 이에 공립협회는 한국과 인접한 지역에 독립전쟁을 구현할 독립군기지 개척에 주력하였다. 그것이 統一聯合論에 입각한 ‘통일연합기관’의 설치였다. 1907년 공립협회 지도부는 독립전쟁 수행거점 확보를 위해 먼저 한국에 통일연합기관 국내지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초순, 安昌浩·李剛·林俊基 등은 미주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Riverside, 河邊)에서 ‘大韓新民會’를 발기하였다. 이들은 대한신민회 발기문에서 “우리 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그 진로로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는 신민회의 發願하는 바며 신민회의 懷抱하는 所以이니 略言하면 오직 신정신을 喚醒하여 신단체를 조직한 후 新國을 건설할 뿐”이라고 통일연합론을 선포하였다. 공립협회의 통일연합론은 당시 해외 한인단체가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만주 등지로 산재된 점을 고려하여 국내외 각 지역에 공립협회 지회를 설치한 후 이를 연합·통일하여 국권 회복과 共和政에 바탕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470) 金度勳, 앞의 글(1989), 17∼26쪽.

 1907년 1월 대한신민회 창건을 위해 안창호를 파견한 공립협회 지도부는 이강·林蚩正·鄭在寬·崔正益 등을 중심으로 통일연합론에 근거해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1907년 7월 창립된 하와이의 國民同盟會와 전흥협회, 시애틀의 同盟新興會 등은 공립협회와 연합상응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공함을 보냈으며, 1907년 9월에는 하와이의 24개 단체가 통합하여 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면서 하와이 한인들의 통일기관임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통합분위기와 맞물려 1907년 11월 하순 공립협회 회원 安定洙와 姜永大가 한인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는 등 한인사회의 통합논의는 지상과제로 떠올랐다.471) 김도훈,<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한국근현대사연구≫10, 1999), 249∼251쪽.

 이처럼 1907년 말부터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인식이 고조되자, 공립협회에서는 통일연합기관의 설치를 본격화하였다. 1908년 1월 경 통일연합기관 국내지부인 신민회 조직을 일단락한 공립협회는 2월 20일 총회에서 하와이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海參威)에 통일연합기관 설치를 의결하는 등 해외지부 설치에 주력하였다. 공립협회가 국내와 인접한 해삼위지역을 주목한 것은 이 지역이 독립전쟁시 국내진공작전 수행에 지리적 이점을 갖추었기 때문에 독립군기지로 개척하려는 인식이었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는 이강·金成武 등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해삼위에 파견하는 등 통일연합기관 설치에 박차를 가하였다. 공립협회의 통일연합기관 해외지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을 목적으로 파견된 이강은 신민회 창건 후 해삼위로 건너가 공립협회 遠東支會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08년 9월 29일 해삼위 水淸(Partisansk)地方에서 金基玉 등 30여 인을 규합하여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를 조직하였다. 수청지방회 조직 후 이강은 海參威港 新韓村 지역의 한인인사들을 규합하고, 1908년 11월 15일에는 鄭淳萬을, 17일에는 蔡成河·尹能孝 등을, 28일에는 吳周赫·韓馨權 등을 공립협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에 공립협회는 12월 13일 지회 설립을 후원하고자 신민회 관계로 국내에 머물던 김성무를 해삼위로 급파하여 1909년 1월 7일 海參威港地方會를 설립하였다.

 해삼위 수청지방회 설립을 계기로 공립협회는 10월 21일 亞細亞實業株式會社를 발기하였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자본금 총액 2만 달러를 총 800주로 나누어 매주 당 25달러로 정하고 자본금 총액의 1/10이 되면 개업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 회사의 본사를 미국이 아닌 해삼위에 설립하고 미주·하와이·한국에 지점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공립협회의 아세아실업회사 설립은 해삼위를 독립군기지 건설의 최적지로 파악하고 해삼위를 중심으로 한국·미국 등지에서 殖産興業으로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1909년 2월 국민회 창립 후, 泰東實業株式會社로 승계되었다.472) 자세한 것은 金度勳, 앞의 글(1989), 26∼30쪽.

 이처럼 해삼위에 통일연합기관 원동지부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공립협회에서는 해외한인단체를 총괄할 통일연합기관 중앙본부 설립을 서둘렀다. 이에 공립협회는 1908년 3월경부터 추진해 오던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2월 1일 국내 유림들까지 축하하는 속에서 4,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國民會가 창립되면서 국민회는 사실상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국민회는 공립협회 시절부터 추진하였던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을 승계하였다. 국민회는 1909년 4월 특파원 黃思溶과 邦化重을 멕시코(Mexico)로 파견하여 멕시코지방회를 설립하는 한편, 동년 5월에는 총회장 鄭在寬을 滿洲地域 특파원, 李相卨을 露領地域 특파원으로 임명·파견하여 공립협회 시절에 파견한 金成武·李剛 등과 함께 통일연합기관 설립을 매듭짓게 하였다. 그 결과, 국민회의 遠東支會 설립운동은 1909년 말 노령과 만주 일대에 10,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13개 지방회의 건설로 나타났다. 이 원동지회 설립으로 국민회는 사실상 공립협회 시절부터 추진하였던 통일연합기관의 설치를 매듭지었다.473) 김도훈,<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앞의 책, 1999b), 252∼253쪽.

 한편 국민회는 1909년 4월 亞細亞實業株式會社를 泰東實業株式會社로 개칭하여 장정과 규칙을 정한 뒤, 5월부터 자본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해삼위에 본부를 둘 것을 명시한 태동실업주식회사는 자본금 5만 원을 확보한 뒤, 국민회에서 파견한 특파원 이강·정재관·김성무 등으로 하여금 1911년 북만주 密山府 峰密山지역에 2,430에이커의 땅을 구매하여 한인 200여 호를 이민시켜 개간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흉년과 개척자금의 절대 부족으로 인해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474) 대한인국민회의 원동지회 설립과정과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박 환,<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 탐구당, 1995).
李明花,<1910년대 재러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1, 1997).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