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5) 일본
  • (3) 2·8운동

가. 2·8운동

 2·8운동은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재일유학생이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독립선언서>와<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이 날의 운동은 재일유학생들이 하루아침에 계획하여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일어날 수 있었던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던 학생들은 일찍부터 서로간에 친선을 도모하고 학문을 서로 권할 수 있는 조직을 형성하고, 상당부분 반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사실, 둘째 재일유학생들이 웅변회·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문제를 표명하고 민족사상을 보다 심화시켜 왔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2·8운동 발생의 직접적인 계기는 영국인이 발행한≪The Japan advertiser≫에 실린, 이승만이 조선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간다는 소식과 미국 신한회의 독립청원 활동과 대한인국민회의 활동, 이광수에 의해 상해에서 독립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본국에서도 불원간 투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소식 등이었다. 특히 미주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은 지용은의 귀국을 통해 그 활동상이 알려졌다.

 이렇게 되자 재일유학생들은 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준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즉 재일유학생들은 수시로 모임을 갖고 국제문제를 비롯한 시국문제를 논의했는데, 이에 기초하여 당시의 정세를 민족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자금을 모으고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과 연대를 구축하면서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2·8운동을 지향하며 동경조선유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1918년 말 당시 재일유학생의 총수는 769명이었고, 그 중 642명이 동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은 당시 유학생 활동의 중심지였고 반일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동경 유학생들을 결집시킨 학우회는 1918년 12월 29일 명치회관에서 망년회를 열었고, 1919년 1월 6일에는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윤창석·서춘·이종근·박정식·최근우·김상덕·안승한·전영택 등은 당시 정세가 조선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동포들도 이미 각각 독립운동의 실행에 착수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열변을 토하여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이날 웅변대회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참가한 학생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져 밤늦게까지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결국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임시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이들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10명의 임시실행위원을 뽑았다. 임시실행위원으로는 최팔용·전영택·서춘·김도연·백관수·윤창석·이종근·송계백·김상덕·최근우가 선출되었는데 이들 중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보충되어 임시실행위원은 모두 11명이 되었다.545)<朝鮮人槪況>, 대정 9년(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 99쪽.

 선임된 임시실행위원들은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그것을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송부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실행위원에 의거하여 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고 이 단의 이름으로<선언서>와<결의문>및<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2·8운동의 중심조직인 조선청년독립단이 활동했던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경 이들 조선청년독립단은<선언서>와<결의문>,<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 국회의원·조선총독부, 그리고 동경 및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개별적인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로 오후 2시부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역원선거를 명목으로 하는 유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동경유학생 거의 대부분인 약 600명이 참가했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서 백관수가<독립선언문>, 김도연이<결의문>을 낭독했다.

 그런가 하면 2월 8일에 필요한 독립운동 문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준비되었다. 한 가지 방법은 비밀장소에서 백관수 지도로 최원순·정광호 및 학생 10여 명이 복사판으로 관계문서를 준비한 것이며, 다른 한 가지, 특히<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일문으로 인쇄할 필요가 있어서 최팔용이 인쇄소에 부탁하여 1,000부를 준비하고 아울러<선언서>와<결의문>을 영문타이프로 준비했다.546) 일설에는<선언서>와<결의문>을 600부 등사했고, 청원서는 1,000부 인쇄했다는 기록과<선언서>와<결의문>을 10,000부 등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성식은 이광수의<선언서>를 최남선이 보았을 것이고, 표현의 순서가<2·8선언서>에 따라<3·1독립선언서>도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국내와의 관계를 보면, 시위투쟁이 구체적으로 준비되지 않았을 때 최남선이 정노식을 만나서 동경의 2월 8일 시위예정일을 2월 20일로 연기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송계백에게 부치라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양쪽이 미리 조직적으로 투쟁준비를 함께 하지 못했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국내에서도 청년과 학생들이 동경 학생들과 거의 동시에 시국에 관한 논의를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2월 8일경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특히 당시 준비과정에서 청산학원의 윤창석 등은 헤리스가 일본정부의 위촉을 받고, 파리로 가서 한국대표의 활동을 방해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도불을 중지시킨 일도 있었다.547) 김성식,≪일제하 한국학생운동≫, 128∼129쪽의 각주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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