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5) 일본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가. 1920년대 초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서의 반일투쟁의 지속적인 전개와 함께 일본에서도 재일조선인들은 단체를 중심으로 보다 활발하게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발전기의 단체 중심의 재일 조선인운동이 본격화된 사건은 니가타현(新潟縣) 朝鮮人勞動者虐殺事件이었다. 1922년 7월 니가타縣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이 학살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와 일본에서 진상을 조사하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조선인 단체를 조직했던 것이다. 그 결과에 기초해 1922년 토쿄와 오사카에서 朝鮮人勞動同盟會가 결성되었다.

 1920년대 전반 재일조선인 조직 가운데 활동성이 강한 사상단체 조직으로는 黑友會·東京朝鮮靑年同盟會·北星會·日月會·朝鮮女子三月會·新興科學硏究會·朝鮮무산자사회연맹·조선인신진회·재대판고려무산청년동맹·재일본배달소년단·堺조선인노동동지회청년단·계림무산청년동맹·조선노동청년단·兵庫縣조선무산동맹 등이 있었다.562) 朴慶植, 위의 책, 105쪽. 이 가운데 1920년대 초 사상단체운동의 중심적 역할은 북성회·일월회가 수행했다.

가) 북성회

 北星會는 흑도회가 1922년 11월 아나키스트와 볼세비키로 분화되어 金若水·金鍾範·宋奉瑀·李如星·安光泉 등 60여 명이 조직했다.

 북성회의 활동은 크게 국내와 일본지역에서의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조선 내 순회강연회·토요회·건설사·북풍회 등의 조직을 들 수 있다. 북성회의 조직원들은 정치적 활동무대를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다가 상당수가 1924년 11월 25일 13인의 핵심적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북풍회를 조직했다.

나) 일월회

 日月會는 북성회의 계속 조직으로 1925년 1월 3일 결성되었다. 이 조직의 상당수는 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三月會·在東京朝鮮無産靑年同盟 등의 간부를 겸하면서 조직을 지도·원조했다. 1926년 11월 28일 일월회는 해체되고 政治俱樂部를 조직했다.

 재일본 조선민족해방운동을 내용적으로 지도하던 일월회내에는 혁명사의 구성원이 들어가 활동했으며 혁명사 토쿄책임은 허장환이었다. 일월회는 1926년 3월 19일<분열으로부터 통일에>라는 팜플렛을 발행했다.563)<社告>(≪사상운동≫3-4, 1926), 40·37쪽.
日本內務省警察局保安課,<大正十五年中ニ於ケル在留朝鮮人ノ狀況>(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212쪽.

 여기에서 다시 한번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했고≪사상운동≫을 통해서 원칙적인 이론투쟁을 제기했다. 1926년 11월 12일 일월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동경조선청년동맹·삼월회 등의 간부들과 함께 정우회·前進會와의 항쟁에 대한 박멸과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했고, 선언에서 파벌주의의 박멸에 대해 언급했다.

 일월회의 자매여성단체로 삼월회가 1925년 3월 李賢卿·황산덕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무산계급과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다) 관동대지진과 재일조선인

 1923년 9월 1일 정오 2분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일본 관동지방에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1백억 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사이토(齋藤實)총독은 일본의 각 신문에 관동지방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합계 6천명으로 이 가운데 조사결과 살해당한 사람은 2명뿐이라고 했다.564) 김건,<학살>(≪한국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984쪽. 사실의 은폐는 일본정부의 발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제는 1923년 11월 15일 현재 피살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으로 발표했다.565) 자세한 내용은 김인덕,<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현장>(≪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1, 자작나무, 1998).

 김승학의 조사에 따르면 학살된 조선인은 관동 전체에서 6,661명이었다.566)≪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최소한 6천명 이상이 학살당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학살당하게 된 요인은 유언비어였다.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많았던 날조된 유언비어는 일본국민 사이에 빠른 속도로 유포되었다. 1923년의 조선인 학살사건은 일본정부의 유언비어에 일본민족이 넘어가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일조선인 운동조직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재일조선인 가운데에도 선진적인 활동가들은 투옥되거나 감금상태였기 때문에 학살사건에 대한 전술도 없었고 규탄운동을 할 체제도 갖추지 못했다. 물론 일본노동자와의 국제적 연대도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연대의식이란 평상시 일상적인 수준에 머문 것이었다.

 1923년 학살 이후 죽을 고비를 넘긴 조선인들은 소실을 면한 유일한 조선인단체였던 천도교청년회 사무실에 모였다. 예정없이 모인 사람들은 제출된 문제에 대해 논의를 계속하여 10월 상순 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를 결성하고 조사사업에 착수했다.

 한편 相愛會의 朴春琴은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주범인 경시총감 아카이케(赤池濃)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박춘금 등의 상애회 일파는 경시총감이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언급했음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선두에 서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화합을 과시하듯 지진 뒷정리의 일환으로 동경 시내를 청소했다. 이후 이들 반동주구단체 상애회 일파는 일제의 지원하에 발전을 거듭했다.

 1923년 조선인 학살로 재일조선인 운동은 일시 후퇴했다. 그러나 학술문제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조선인은 빠른 속도로 조직들을 결성했다. 반인륜·반민중적 학살을 경험한 재일조선인은 반일투쟁을 조직적이고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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