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1) 북간도의 시위운동

 만주지역은 일찍이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서 근대에 들어와서도 1860년대이래 우리 민족이 기근을 피해 越境·개척하기 시작하여 3·1운동 당시에는 북간도 지역에 35만, 서간도 지역에 25만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 동삼성 일대와 시베리아·연해주까지 합치면 150만에서 200만의 동포가 분포하여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 북간도 지역은 두만강 건너 汪淸·延吉·和龍·渾春縣을 말하며, 서간도는 압록강 건너 남만주지역으로 長白·臨江·輯安·寬甸·撫松·通化·桓仁·興京·柳河縣 등을 말한다.

 북간도에는 墾民會·墾民敎育會 등의 항일운동단체가 있었고, 서간도에는 耕學社·扶民團·韓族會 등이 있어 민족운동의 구심체가 되어왔다. 북간도는 1906년 서전서숙 설립 이래 明東·昌東·正東·光成學校, 서간도의 新興學校 등 이곳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민족주의 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통하여 적절한 기회가 오면 조국을 광복하고자 한 원대한 독립운동 방략의 일환으로 운영되었다.

 1907년 일제는 연길현 용정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국자가·훈춘 등 여러 지역에 영사관 분국과 경찰서를 설치하여 이주 한인에 대해 압박을 가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1915년 5월 9일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중국 관헌들까지 독립운동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세계대전의 발발로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대했던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공개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군국주의적 군주국가의 패망과 민주주의 국가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파리 강화회의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국내외 동포들이 한국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641) 서굉일,<중국·만주지역의 3·1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3, 1988), 406∼410쪽.

 1919년을 맞으면서 이러한 독립운동 준비를 블라디보스톡과 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령 연해주와 연계하여 추진했다. 선언서의 제작, 파리 평화회의 대표 파견 등이 선정되고 이들을 파견할 여비를 모금했다. 이때 광무 황제의 붕어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는 추모예배 또는 봉도회가 열렸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2월 18일과 20일 북간도 독립운동가 33인의 비밀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결정되었다.

① 북간도 내 각 교회 및 모든 단체는 서로 단결·협력하여 조국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할 것.

② 노령 연해주에서 협의 반포할 독립선언서의 공표와 동시에 간도 내 모든 단체는 시위운동을 개시할 것.

③ 한민족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 내 각 단체의 유력자들은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기세를 앙양시킬 것.

 (姜德相,≪現代史資料≫27, 동경:みすず書房, 1965, 84∼85쪽).

 또한 시위운동 중 일제 관헌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혈서로 결의하고, 명칭을 光復團이라 하였으며, 북간도의 국자가·용정촌·종성·간도 滋洞·팔도구·평강의 5구역에 8명의 책임자를 정하였다.642) 姜德相,≪現代史資料≫27(동경:みすず書房, 1965), 85쪽. 간도지역 청년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각 학교에서는 연설회를 열고, 2월 29일 밤에는 일본 영사관 분관에 방화미수사건도 있었으며 3월 1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용정의 학교와 교회에서 3회에 걸쳐 만세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643) 서굉일, 앞의 글, 417쪽. 용정의 지도급 청년들은 기독동지청년회를 조직하고, 같은 날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19년 3월 7일 국내에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여 왔다. 이에 연해주 국민회의 결과를 기다리던 북간도 지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朝鮮國民議事部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墾島居留朝鮮民族의 이름으로<獨立宣言布告文>을 작성하였고, 이와 별도로 강봉우와 이지택에 의해 전해 온 서울의<독립선언서>에 북만주 조선민족대표자 17인을 첨가하여 등사하였다.644) 현규환,≪한국유이민사≫상(어문각, 1967), 617∼618쪽. 10일부터 각급 학교는 휴교 조치하였다. 시위운동의 장소는 일제의 간도 침략의 거점이며 일본 총영사관 소재지인 용정으로 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한 일제는 중국측에 외교적인 압력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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