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중순, 미국에 있는 한인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모여 노령에 있는 동포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특파할 미주 대표자를 선정하였다는 것을 통지하여 노령 동포의 대표자도 프랑스로 특파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노령의 독립운동가들은 니콜리스크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재노령 조선인 대표자를 프랑스로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그 대표로서 李東輝(재노령 조선인 대표)·白純(재동청철도연선지방 대표)·崔才亨(귀화한인 대표)·李鏞(국내 대표, 이준의 장남) 등을 선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용이 중국에 거주하는 까닭에 조선 내지를 대표할 자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노령 한족회에서는 1월 하순 李興三을 조선 내지에 밀사로 보내 한족독립운동에 대한 권유위원이 되게 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유력인사들에게 이용에 대한 위임장에 연명날인하게 하여 상해의 이용에게 교부할 계획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회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尹海와 高昌一로 확정되어 이 두 사람은 1919년 2월 5일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된 ‘조선인 총대표’ 증명서를 소지하고 파리를 향해 니콜리스크를 출발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