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2)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책

 1919년 7월 조선군 참모부는<친일조선인 유력자의 이용 및 보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일제가 3·1운동 이후 친일세력을 어떻게 육성하여 이를 이용하고 보호해 나아가고자 하였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합병 전부터 우리에게(일본) 호의를 갖고 계속해서 친일적 태도를 가진 상당한 지위와 수완을 보유한 자로서 이들을 유용·보호하는 데 한층 힘을 써야 한다. 한일합병 공로자로서 친일한 자를 지금 귀족으로 앉혀 놓았으나 그 대우에 있어서는 아직 유감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이들에 대해서는 귀족원 의원의 자리를 약간 마련하여 공로에 보상해주면서 보호하여 우리 정치의 일부에 관여하게 해도 굳이 안될 것은 없다. 그리고는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인 유력자의 회유에 노력한다면 그 효과는 클 것이다. 그 외에 진실한 친일자로서 전력을 다하고 있는 자는 크게 보호하고 우대해 주는 방도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진정한 친일자에 대한 보호·이용은 앞으로 더욱 더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651쪽).

 일제가 이렇듯 친일파를 보호·육성하여 식민통치의 내실화를 기하고자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지인의 협력에 대해서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친일파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비중을 두면서 적절하게 이들을 이용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먼저 이들에 대한 접근은 개인과 단체로 구별할 수 있다. 개인과 단체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상호 보완관계를 가지면서 추진되었다. 또한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은 조선인이 집단적 행동으로 저항을 표출하였을 때, 경제적인 문제점이 상당히 노출되었을 때 강하게 제기된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 사이토는 내지연장주의를 주창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고 하는 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물론 이러한 작업 대상은 전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특수층에 한하였다.107)朴成眞, 앞의 책, 141∼144쪽. 예컨대 정치세력·기업가·문화인 등과 같이 개인의 역량이 미칠 파급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한 포섭이 이루어졌다.108)1937년 조선총독부 學務局 社會敎育課가 주도하였던 朝鮮文藝會는 친일파의 육성과 친일단체의 조직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高崎宗司, 앞의 글, 126쪽). 게다가 전시체제하에서 친일파나 친일단체가 벌인 행위는 192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친일파 육성 및 이용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이전 친일파의 대표군은 이완용을 비롯한 자들이 작위를 받고 들어간 총독부 자문기구였던 중추원이었다. 이 기관은 의장, 부의장 및 고문 5인에게는 모두 親任 대우를, 참의 65인은 주임 대우를 부여하였다. 의장은 정무총감으로 하고 부의장 이하 임기는 3년을 원칙으로 하였다. 특히 이들 구성원은 거의 총독의 주청에 따라 일본 내각에서 결정하였다. 이를테면 조선총독의 권한을 넘어 일본 본국에서 친일파의 육성과 보호책을 결정하였던 점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명분을 얻기 위한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다.109)金度亨,<日帝侵略初期(1905∼1919) 親日勢力의 政治論 硏究>(≪啓明史學≫3, 1992), 6쪽.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 주로 구한국관료 및 문명개화론자들을 적극 회유·이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방침은 일제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문명개화론자를 친일세력으로 양성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제가 그들의 통치이념을 경제적인 힘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당시 상당수의 개화론자들은 친일세력이 되었다.110)金度亨, 위의 글, 14쪽. 나아가 일제는 합병 당시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였던 一進會와 같은 조직적인 친일단체보다는 친일세력권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즉 친일조직보다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보다 공고히 식민지통치를 경영할 수 있는 인적 토대를 갖추고자 하였다.

 일제 식민통치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회유와 통제(탄압)이다. 일제는 이 방법을 사용하면서 적절하게 조선인을 이용하였다. 1919년 조선총독 사이토가 부임하면서 시행된 새로운 관제개혁은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총독부에서는 민의창달을 목적으로 지방유지를 소집하여 총독정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1919년 9월 19일부터 1주일간에 걸쳐 각 도의 유력한 명망가 및 신지식인 51명을 경성으로 소집하여 총독의 시정방침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111)朝鮮總督府,<倂合の由來と朝鮮の抵抗>(≪齋藤總督の文化統治≫), 47쪽. 즉 “총독부의 시정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자가 적지 않고 이들 대다수는 시정방침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개혁의 취지를 지방민에게 철저히 주지시키고자 지방유력자들을 소집하였다”112)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42쪽.는 것이다. 이들 51명은 각 도의 장관으로부터 추천된 자들로 이전부터 친일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이들은 초청하여 강연한 것은 즉각적인 효과를 거두기 보다는 새 통치방침에 정략적인 투자를 하여 후일 식민지인에 대한 원활한 통치를 행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113)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42∼143쪽.

 다음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친일태도를 가진 조선의 유력자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문화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식민정책의 협력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에 대하여 배일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자들을 회유하고 나아가 이들을 친일분자로 만들고자 하였다.11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651쪽. 뿐만 아니라 사이토 총독은 내지연장주의에 기초하여 일본인과 같은 조선인을 육성하지 않고는 조선지배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내세웠다. 친일분자를 귀족·양반·유생·부호·실업자·교육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그 계급과 사정에 따라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할 것이며, 친일적인 민간 유지자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조선 청년을 친일분자의 인재로 양성할 것, 양반 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민정염탐에 이용할 것, 조선인 부호·자본가에 대해 일선 자본가의 연계를 추진할 것,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진흥회를 조직할 것 등이다.115)姜東鎭, 앞의 책, 167∼168쪽. 또한 일제는 종교적 사회운동을 이용하기 위해<사찰령>을 개정하여 불교 각 종파의 총본산을 경성에 두고 이를 관장하고 원조하는 기관의 회장을 친일분자로 앉히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한다는 방침도 정하였다.116)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90∼191쪽.
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統治と基督敎>(≪齋藤總督の文化統治≫) 참조.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를 내세웠다. 하나는 내지연장주의라는 일체감을 부여하여 식민지 동화정책을 채택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조선의 고유한 풍습·습관을 훼손하지 않고 식민지인을 일본의 문명화된 세계로 인도하여 발전시킨다는 것이다.117)朝鮮總督府,≪齋藤實文書≫13, 132쪽. 따라서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식민지의 지도층에 대한 회유공작이 우선되었다. 사이토는 재임 7년 8개월 동안 鮮于金筍을 119회로 가장 많이 면회하였으며, 李軫浩·李堈·純宗·韓相龍·閔興植·宋秉畯·申錫麟·方台榮·朴泳孝 등도 자주 만났다. 이 가운데 송병준은 사이토의 부임 초기에 자주 면회하였으나 후기에는 거의 면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토 재임 후기에 올수록 친일관료와 매판자본가들의 면회 빈도가 점차 증가하였다.118)姜東鎭, 앞의 책, 169∼171쪽. 강동진은 사이토 총독의 친일세력 육성책의 기본은 정치선전과 첩보활동에서 일해 온 직업적 친일분자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친일각료를 더 보탠 이원제였다고 하였다.

 한편 사이토는 조선귀족에 대한 이용가치의 상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매국노라는 조선인의 질시를 부담으로 여겨 관료들에 대한 친일화 작업을 선호하였다.119)姜東鎭, 앞의 책, 178∼181쪽. 조선 귀족들은 박영효 등과 같이 몇몇을 제외하고 사이토 총독과 면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즉 조선통치를 원활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노쇠한 조선귀족보다는 일본유학을 경험한, 새로운 문물을 접한 조선인 고급관료의 친일화 작업이 효용성이 크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일관리의 육성과 이용은 이른바 관제개정을 단행하면서 조선인 관리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일본인과 동일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듯이, 이들의 조직적인 협력없이는 조선통치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였다.120)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648쪽.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 관리에 대해서 한일합병 직후 조선인 관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봉급 및 기타 처우에 차등을 둔 것은 사실이나 1919년 관제개정 이후에는 이러한 차별을 없애고 ‘一視同仁’의 원칙에 따라 일본인 관리와 함께<고등관 관등의 봉급령>및<판임 봉급령>의 적용에 따라 대우하였다.121)朝鮮總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齋藤總督の文化統治≫, 41쪽.

 하지만 이러한 개정 법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관리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차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 일시동인·내선일체·내지연장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잠재적 저항세력인 식민지 민중에 대한 차별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친일적인 관료를 양성하였을지라도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122)朝鮮總督府,<朝鮮治安の現狀及將來>,≪齋藤總督の文化統治≫, 394쪽. 따라서 이들에게 ‘친일성’은 승진과 연관되는 것이었므로 총독부에서의 힘든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더욱 친일에 열성을 쏟았다. 1919년부터 21년까지 사이토 총독을 5회 이상 면접한 친일관료로는 도지사 및 학무국장을 지낸 李軫浩·魚潭·具然壽·吳台煥·張憲植·金潤晶 등 6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퇴임기에는 5회 이상이 17명으로 증가한 사실로 비추어 보아 당시 조선총독부의 친일파 육성·이용정책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123)姜東鎭, 앞의 책, 189쪽.

 3·1운동은 일본의 조선 통치에 표면적으로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조선인에 대한 식민화정책의 실상을 선전하고 저항세력의 감시체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체계적인 회유공작으로 나타난 반면 직업적 친일분자를 생산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이 모아지게 되었다. 1919년 11월 수상 하라는 정무총감 미즈노에게 조선의 치안상 기밀금을 증액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100만 엔의 기밀비를 책정하였다. 이러한 기밀비는 대부분 직업적 친일분자를 양성하는 데 유용한 자금이었다. 이렇게 많은 자금을 들여 직업적 친일분자를 양성하는 이유는 이들이 물욕에 가득찬 이기주의자라는 점을 일제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124)姜東鎭, 위의 책, 194∼195쪽. 총독부에서는 거액의 자금을 살포하여 직업적 친일분자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민족적 정신에 호소하기 보다는 금품에 의한 포섭과 회유가 수월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결과이다. 이렇게 조선총독부의 자금을 받아 친일행위를 수행한 자들은 李紀東·朴春琴을 비롯하여 박영효·신석린·선우순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는 자본제를 이식하면서 본국의 자본주의 발달을 위하여 1920년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에서 친일적 민족부르주아의 성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기업가들은 조선총독부에 대한 협력과 타협없이 기업활동을 영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총독정치에 대한 타협의 산물로 기업운영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125)박섭, 앞의 책, 129쪽. 1920년대 기업자유화정책에 따라 매판자본가들은 총독부에 대한 ‘협력’을 담보로 ‘보상’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에도 조선인 자본가들이 자본축적을 위해서도 총독부의 협력을 받은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920년대의 예속자본가로는 閔大植·閔應植과 한상룡·芮宗錫·張稷相·白完赫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金性洙와 같이 경성방직을 경영하면서 일제와 타협한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126)姜東鎭, 앞의 책, 214∼215쪽. 특히 일제는 지방 거주의 조선인 갑부를 이용하여 재지세력의 동화를 꾀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청도의 갑부인 김갑순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신장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나아가 신분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일제통치기에 정치적인 성장을 도모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池秀傑,<日帝下 公州地域 有志集團 硏究-사례2 : 金甲淳(1872∼1960)의 ‘有志基盤’과 ‘有志政治’>,≪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1997 참조). 예속자본가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였으며 이를 식민지 통치와 연계하여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막기보다는 일본 자본을 흡수하여 조선인 자본을 예속하고 나아가 이를 이용하여 실질적인 일본 자본의 축적을 단행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이 시행되었다.

 요컨대 조선총독부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고 나아가 대륙침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을 잡음없이 통치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사이토 총독이나 일본 본국의 입장에서는 대민업무를 포함한 기타 행정업무를 월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인과 같은 조선인을 육성·보호·이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워진 친일파들은 일본인보다 더한 일본인으로 탈태한 경우도 있었으며, 이들의 역할은 1930년대 말 전시체제하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더욱더 협조하는 양태로 표출되었으며, 지식인 및 예술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은 단박약과 같은 폭력적 억압책으로는 식민체제의 유지가 힘들기 때문에 나타난 하나의 고육책이자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동화정책이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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